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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양성 등 종사와 향당을 위하여 헌신진력하신 한편 일제 강점 초기 토지 수탈 정책의 추진과 함께 토지 세부 경계 측량을 실시하면서 강압적 만행을 자행하자 1914년 8월 26일 27일 양일간 당시 면장 남상순 공과 전중진 이진우 남차권 이일우 이정신 남종우 남찬우 공을 비롯하여 수백명의 면민을 동원하여 항쟁을 주도하신 바 소위 「정곡벌 난리」였다. 이 항일투쟁의 선도자로 지목되어 1914년 8월 29일 왜경에 피체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셨고 결국 소요 및 공무집행 방해죄목으로 기소되어 1914년 10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를 받고 항소하여 191년 1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동일 죄목으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시고 출옥하신 뒤 악형의 후유증으로 누년 신고하시다가 조국 광복의 환희도 보시지 못한 채 1926년 1월 13일에 서거하시니 향년 67세이셨다. 배위는 담양전씨 경진공의 영교로 정숙단장하시고 효성과 부덕을 겸전하신지라. 동중의 칭송을 받으셨는데 을묘에 탄생하셨고 신유 음 2월 13일에 엽세하셨다. 슬하에 4남 4녀를 두시니 기도 기순 기문 기무공과 여서로 회산 황기수 함안 조동규 조성근 영산 신윤호 공을 맞이했으며 그 밑으로 많은 친외손을 두신지라 후손의 번연함은 선세의 음덕여광이리라. 선생의 덕업과 항일애국의 행적은 세월에 묻힌 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중 선생의 손 효현과 증손 택홍이 증거 자료 수집과 정부 당국에 청원을 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서거하신지 74년만인 2000년 8월 15일 광복절에 항일운동 유공자로서 건국훈장 애족장(제3592호)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유훈유덕과 항일애국정신은 청사에 길이 남아 빛날 것이며 후예와 후진들에게는 영원한 사표로서 추앙받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