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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美山(老姑山) 興國寺 萬日會碑記 /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만일회비기 금년 8월 흥국사 해송 주지스님께서 돈을 내어 비석을 마련하고 상좌 윤진 스님을 개운사에 머물고 있는 내게로 보내어 만일회비기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절의 기록을 살펴보니, 근년의 큰 업적이 만일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량을 장엄하고 상정을 조성하여 사람들을 감동케 한 일이 자못 많다. 그러나 노스님께서는 진실한 가풍만을 준수할 뿐이요 일을 떠벌려서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그저 도량에 모여 부처님 명호를 외우고 탑묘를 장엄하고 경전을 공부하고 재계하여 계율을 지키기를 수십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니, 여타의 허무를 뇌까리고 실컷 노닥거리며 부처님을 속이는 무리들과 한 가지로 말할 수는 없다. 전해오기를, 이 절은 신라 문무왕 원년(661) 해동의 화엄초조 대사가 원효대사가 양주 천성산으로부터 북한산에 와서 머물면서 몇 곳의 절을 지었으니, 북한산성 서쪽의 원효대가 그 첫째요, 노고산의 홍서암이 그 다음이며, 석조약사불상도 같은 시기에 조각한 것으로써 1천백여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엄연히 모셔져 있다고 한다. 암자를 사로 바꾸어 흥국의 호를 내린 것은 조선 영조 때의 일이다. 산명을 한미로 바꾼 것은 노고(할미)의 소리를 옮긴 것이요 별다른 의미는 없다. 영조가 ○저에 계실 때에 북한산에 와서 향을 사룬 적이 있었더니, 왕위에 오른 뒤 세모에 소녕원에 거둥하던 길에 이 절에 들렸다가 대설을 만났다. 영조는 버들가지로 「來心有喜 尺雪驗豊徵 : 조래심유희 척설험풍진(아침나절에 기분이 상쾌하더니, 한 자 눈이 내려 풍년을 예고하네)」라는 5언시구를 전각에 새겨두고, 또 약사전 3자를 써서 내거니, 사중이 모두 기뻐하였다. 철종 갑인년(1854) 봄에 장련군 학서사에서 옹정 신해년(1731)에 주조한 4백여근짜리 범종과 삼존불상, 칠성목탱을 모셔왔다. 철종 무오년(1858) 여름 신사 박수량이 거금을 희사하여 도량에 7층의 축대를 쌓았는데, 매 층이 한 길씩이나 되니 이 얼마나 큰 공사인가. 고종 정묘년(1867) 가을에 화주 곽명스님이 약사전을 중건하고, 고종 병자년(1876) 여름에 화주 뇌응스님이 칠성전을 짓고, 고종 무인년(1878) 가을에 주실 완해스님이 주선하여 내탕금을 얻어 괘불탱화를 조성하니 대단히 넓고 길었다. 광무 임인년(1902)에 화주 뇌응스님이 나한전과 산신각을 세웠으며, 광무 갑진년(1904) 10월 회주 완해스님이 선도하여 상궁 김정덕행과 장정심화, 정대덕행과 함께 발원하여 만일회를 창설하였다. 만일회란 백련사의 이칭으로써 30년 동안 염불하며 부처님을 모실 것을 기약하는 모임이다. 그때에 대중들이 혜월스님을 선발하여 연사의 화주로 삼았다. 이듬해 을사년(1905) 봄에 진관사의 해송스님을 맞이하여 연사의 회주로 삼았다. 융희 무신년 가을에 상궁 오씨와 신사 원학주가 중흥사의 금고를 사서 사중에 헌납하였다. 1911년 건봉사의 회명스님이 연사의 성취를 위하여 양양의 논 80두락을 헌납하였으며, 같은 해 가을에 서울의 청신녀 박신심월이 불량답을 헌납하며 절 땅을 함께 매각하여 통천의 땅을 마련하니, 1년에 도조가 4백여 말이 되었다. 1912년 혜월스님이 입적하매 이듬해부터 대중의 요청에 따라 해송스님이 화주의 일을 겸임하였다. 그해 신녀 정원만행이 3백금을 내어 상해 빈가정사판 대장경을 구입하여 사중에 보관하였다. 1913년 겨울 주실 해송스님과 뇌응·풍곡·호봉스님 등이 협력하여 국유림 26정 9반 8무를 임대받으니, 원래 사유림은 30정 9반 5무였다. 1915년 여름에 대중이 건물 2동 32간을 짓고, 1917년에 또 향각과 동별당 2동 14간을 지으니, 대가람이 이루어졌다. 이듬해 여름에서 겨울까지 화엄법회를 거듭 개설하였다고 한다. 아아! 오늘날 사문의 풍조는 예전과 아주 달라서 부처님을 팔아먹고 상주물을 함부로 쓰는 것을 예사롭게 여기며 바깥에 권속과 사가를 두어 저자를 이루니, 거의 사문으로서의 행실을 잃어버린 지경이다. 그러나 해송스님과 그 청정대중들은 연사를 맺은 이래 26년 동안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함께 기십만번 염불 정진하여 깊이 불법의 바다에 들어갔으니, 과연 경에 이른 바대로 연잎 위에 성태가 이미 향기롭구나. 또한 사묘를 장엄하고 화엄법계를 연설하니, 이와 같은 가람은 옛날 불교가 융성했던 때에 비추어 보더라도 조금도 손색이 없거늘. 하물며 말법시대에 있어서랴! 너희들 태산·화산과 노고산의 영령들은 때맞추어 와서 길이 산문을 보존할지어다. 불기 2956년 기사 (서기 1929년) 중춘일(양력 3월 일) 귀산사문 정호(박한영) 찬(글 지음) 성당 김돈희 서(글 씀) 글 지음) 소熙글 씀) [비석뒷면] 대시주 순서 고종황제폐하 순비갑인생 엄씨 외 18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