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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명성황후, 그는 누구인가? 23 제국주의의 파고가 드높았던 19세기 의 격변기를 살다간 명성황후(明成 皇后).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유학자 들이 남긴 부정적 평가의 영향으로 ‘권력욕에 불타는 사악한 여인’, ‘집 안을 망친 암탉’으로 그려졌던 망국 의 황후. 1895년 10월 8일 새벽 6시 경, 45세라는 중년의 절정기에 일제 가 휘두른 칼날 앞에 비명에 스러져 간 비운의 황후. 그녀는 어떤 인물이 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황후를 기 억하고 평가해야 하는가? 황후의 성장과 내면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2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 섬락리 에서 여흥민씨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민치록은 숙종의 비(妃)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의 5대손이다. 문음(門蔭)으 로 벼슬길에 나아가 장릉참봉(章陵參奉)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친 뒤 과천현감, 덕천군수 등의 지방행정을 맡았다. 황후의 어머니는 좌찬성 이규년(李奎年)의 딸인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슬하에 두었던 1 남 3녀가 모두 요절하고 황후 홀로 무남독녀로 자랐다. 황후의 집안인 여흥민씨 가문은 왕비를 여러 명 배출할 정도로 가격 (家格)이 매우 높은 집안이다. 조선의 국왕 가운데 3대 태종의 비, 숙종 의 비로 유명한 인현왕후,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부인, 대원군의 부인, 고종의 비, 순종의 비가 모두 여흥민씨 가문 출신이다. 그런데 명 성황후 아버지 대에 와서 민치록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일 찍 사망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황후는 8살 때 부친이 사망한 후 서울에 올라와 인현왕후의 친정인 감고당(感古堂)에서 생활하였다. 감고당은 안국동 덕성여고 자리에 있 었고, 현재는 여주 명성황후 생가에 복원되어 있다. 황후의 어릴 때 이 름은 자영(紫英, 玆暎) 또는 정호(貞鎬)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모두 명확 한 사료적 근거는 없다. 다만 황후가 태어날 때 “붉은 빛이 비치면서 이 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 찼다”라는 고종이 쓴 「어제행록(御製行錄)」의 내용을 근거로 지어졌거나, 태호·승호·겸호 등 동렬 사촌들의 호(鎬)자 항렬을 따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황후는 『소학(小學)』이나, 『효경(孝經)』, 『여훈(女訓)』등 당시의 여성 들이 학습하고 익혀야 하는 책들을 일찍이 탐독한, 매우 똑똑한 여성이 었다. 한말의 대표적인 유학자 황현도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왕비 가 전고(典故)를 두루 암기할 정도로 총명하다”라고 언급하였다. 옛날 의 유교 경전이나 고사 같은 것을 두루두루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암기 력이 아주 뛰어났다는 의미이다. 황후와 대면한 바 있는 세계적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Isabella.B.Bishop), 황후의 어의(御醫)로 활동했던 언더 우드(Lillias.H.Underwood) 여사 등도 황후가 매우 지적이고 명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