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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평안도 지역 3 · 1운동의 전개와 양상 23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 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독 립국임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 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거 족적으로 평화적 만세시위를 벌인  역사적 사건이다. 이 운동은 경기도 의 서울과 고양, 평안북도의 의주와  선천, 평안남도의 평양, 진남포, 안 주, 함경남도의 원산, 황해도의 해주 에서 동시에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 되었다. 이 가운데 평안도 지역 3·1 운동의 전개와 양상을 그 준비 과정 부터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의주, 선천에서 시작된 평안북도의 3·1운동 의주에서의 3 · 1운동 준비는 유여대(劉如大) 목사가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에 참석한 길에 그곳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이승훈(李昇薰) 장 로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김병조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 하기로 한 1919년 2월 13일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2월 17, 18일경 그 가 전에 교원으로 있었던 양실학교 교사인 정명채, 김두칠을 참여시켜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 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의주 읍 내에 있는 서예수교회당(西耶蘇敎會堂) 부근 공지에 양실학교 교사 학 생들을 비롯한 주민 700~800여 명이 모여,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유여대 목사가 주재하는 독립선언식을 거 행했다. 순서는 ① 찬미가, ② 기도, ③ 식사(式辭), ④ 선언서 낭독, ⑤ 독립 창가 합창, ⑥ 만세, ⑦ 의주성(義州城) 내외의 행렬 행진으로 이루 어졌다. 식이 시작되자 함께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압록강 건너편 안동 현(安東縣)에 거주하던 김병농(金炳穠) 목사가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도 록 하나님께 비는 기도를 드렸다. 이어 유여대 목사가 ‘이로부터 독립 선언식을 거행한다’는 식사를 말하고 나서,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도쿄에서 발표된 ‘2 · 8독립선언서’를 원고로 그날 새벽에 등사판으로 등사한 선언서를 낭독하려 했다. 그런데 때마침 서 울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140~150매가 도착하여 그것을 낭독했다. 이어서 북하동교회 영수(領袖) 황대벽(黃大闢)과 송장면 창원교회 조 사(助事) 김이순(金利淳)이 독립선언서의 취지와 같은 독립에 관한 연설 을 하고, 김두칠, 정명채, 김이순, 김창건, 강용상 등이 그곳에서 준비 한 2 · 8독립선언서 300여 매를 배포하던 것을 중지하고, 서울에서 선천 을 거쳐 그 때 막 도착한 서울 인쇄 독립선언서를 모인 사람들에게 배 포했다. 그리고 이날을 위해서 미리 지어둔 독립 창가를 모인 사람들과 함께 합창했다. 이후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고, 학생들을 선두로 독립만세와 「독립 창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에 들어갔 다. 이에 놀란 헌병들이 달려와 해산을 강요했으나 오히려 시위대는 점 점 더 늘어 2,000여 명에 이르렀다. 행사 직후 일제 헌병경찰은 유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