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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윤봉길의사가 일본의 대륙침략을 단신으로 응징한후 조국독립 제단에 선혈을 뿌리고 거룩하게 순국한 곳이다. 때는 1932년 4월 29일 일본군의 중국상해사변을 전승축하겸 일황생일 축전이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되었다. 이떄 군중속에 있던 윤의사는 홀연히 돌진하여 경축대를 향하여 폭탄이 장치된 수통을 던졌다. 천지를 진동케하는 폭음과 함께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어 일본군 수뇌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일본 거류민당장 가와바다 사라쓰구는 즉사하고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은 입원 가료중 사망했으며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한쪽다리를 절단당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은 실명하였다.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과 민단간부 도모노(友野盛) , 주중 상해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츠(村井倉松)은 중상 경상을 입었다. 윤의사는 또 하나의 폭탄으로 자폭하려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일본군 상해파견군 헌병대로 끌려갔다. 그후 엄중한 취조를 받은 다음 사형판결을 받고 11월 18일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오사카 衛成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그해 12월 18일에 가나자와 육군형무소로 이감되더니 그 익일인 19일 호전 7시 40분 이곳 가나자와 교외 삼소우 공병작업장에서 십자가형구에 매인채 총살형으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향년 25세의 젊은 나이였다. 윤의사의 본명은 우의요 자는 용기이며 매헌은 아호이고 봉길은 별명이다. 1908년 6월 21일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포양리에서 파평 윤황공과 경주 김원조여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백부 윤형공에게 글을 배웠고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