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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한학을 닦고 충효에 뜻이 깊었으며 구한말의 왜적의 침략마수가 뻗치고 있을때 뜻한바 있어 예천군 수서기직을 맡으니 군민들에게 배일구국사상을 고취하다가 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되자 분연히 칼을 짚고 일어나 왜요인과 매국노들의 모참을 목적으로 1907년 4월 상경하였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골수에 사무친 의분을 가눌길 없어 재거를 꾀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동년 7월 예천군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풍기, 봉화, 문경, 용궁,예천등지의 적을 소탕하다가 동년 9월 10일 이강년, 민긍호등 의병장과 합진하여 1000여명의 병력으로써 문경면 갈평리 전투에서 흉적 미하라소위와 영합경시가 인솔하던 수비대및 경찰대를 섬멸시켜 적유의 간담을 서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병들의 용맹은 천하를 뒤흔들었다. 여기서 다시 병력을 나누어 선생은 대구수비대를 격파하기 위하여 대를 향해 진격하던 도중 상주읍에서 적의 자위단과 다나카대위가 인솔하는 대구수비대를 만나 격전끝에 총총상으로 피첩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굴하지않고 도리어 정작을 크게 꾸짖은 뒤 스스로 혀를 끊어 결구불언의 곧은 절개를 지키다가 상주군 함창면 구향리 뒷산에서 비분의 총살형을 당하시니 때는 1907년 9월 16일 향년이 35세이었다. 부인 함녕김씨는 성률공의 따님으로 숙덕이 있더니 변을 당한 후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유리표박으로 잔명을 이어오다가 1942년 선생의 35주기 기일에 세상을 떠나시니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장남 시환의 아들에 기목, 기홍, 기봉이 있고, 차남 인환의 아들에 기진, 기웅이 있는데 모두 총준한 인재들이요 증손에 국현, 문현, 진현, 익현, 원현, 항현 재현, 성욱이 있으나 아직 어리다. 이제 광복된 조국에서는 경향의 ?산들이 힘을 모아 숭고한 유지를 받들고 의로운 사적을 길이 전하고자 광복 20주년을 기하여 경북대학교에 순국비를 세우고 또한 이 묘비를 다듬어서 나에게 글을 청하니 내 비록 그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