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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열사 순교자 구연영 전도사
구연영 전도사는 이천중앙감리교회의 3대 담임교역자로서 1864년 8월2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춘경, 본관은 능성이며, 18세 때 변미례와 결혼하여 슬하에 정서(1883년생), 성서(1884년생), 완서(1898년생)와 종서(1902년생) 네 아들을 두었다.
1895년 10월8일 충격적인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강압적인 단발령의 시행 등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구연영은 김하락 김태원 조성학 신용희와 함께 의병봉기를 통한 무력항쟁을 결심하고 1896년 1월 1일 이천에 내려와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하고 동지들과 함께 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 중군장의 중책을 맡았다. 1월 17일 처음으로 넓고개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이후 이현전투 남한산성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의병 투쟁을 앞장서서 지휘하였다. 6개월 정도의 무력항쟁을 계속하면서 점차 전투력의 한계를 절감하였고 때로는 동족을 살상하는 관군과의 전투로 회의를 느낀 구연영은 다른 방법을 찾고자 5월 25일 의성 비봉산 전투를 끝으로 김하락과 헤어져 자기를 따르던 이천 광주출신 의병 30여명을 거느리고 회군하였다.
그 후 6개월 정도의 은둔 고심 끝에 1897년 2월 자진하여 상동교회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고 전덕기 목사가 이끄는 엡윗청년운동에 참여하여 민족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구국활동과 독립운동에 전념하였으며 3년 후(1899년 3월)에 덕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신학교육을 받고 가장 활동적인 권서인(勸書人)이 되어 이천 여주 용인 음성 충주 제천 등의 지역을 도보로 육천여리나 순회하며 천권이 넘는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였고, 선교와 구국 한글계몽운동을 겸하며 노곡, 궁평, 양평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2년 권사직분을 받고 교회지도권을 확립 이천 읍내로 이주하여 이천 구역 24개 교회를 돌보는 책임을 맡게 되었고, 아들 정서도 권사가 되어 부자가 함께 이천, 광주지역 교회를 돌보았다. 또한 신학회에 참석 목회자의 자격을 구비하여 1905년 이천 구역 담임 전도사가 되었고, 이천읍을 중심으로 광주, 장호원, 여주, 음죽, 용인, 안성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19개 교회 1302명의 교인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6년 전에 의병활동을 하던 지역을 칼 대신 성경을 들고 십자가의 구원을 외치며 순회하였고 특히 의병동지 장춘명 안옥희 한창섭 차화춘 등에게 전도하여 그들이 대부분 기독교 초기의 지도자로 선교활동과 애국계몽에 적극 참여토록 하였다.
구연영 전도사는 1899년 세례를 받을 무렵부터 신·망·애(信·望·愛)를 강령으로 구국회를 조직하여 기도회를 열고 애국운동과 민중계몽 그리고 선교활동을 계속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으로부터 이준열사 순국, 고종의 강제퇴위, 정미 7조약, 강제로 군대해산 등의 일을 보고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일진회원들의 매국적인 행위를 규탄하며 국민들의 단합과 애국적인 행동을 호소하고자 선교집회를 계속 열게 되었다.
1907년 8월경 이천의 군들 장터에서 장날을 기해 대규모 집회를 열었는데 이천 지역의 교인들과 장에 나온 일반 국민을 모아 운집한 인원이 이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그 중에는 의병에 나갔던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구연영의 구국적인 선교와 애국활동 대규모집회 등으로 일진회원들은 더욱 심각한 위험을 느끼고 구연영 부자를 그냥 놔두면 점점 더 선교활동과 애국운동이 불길처럼 확산될 것으로 판단 일본군 수비대에 밀고하였고 이포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 구연영 父子 집을 급습하여 체포하였다. 구연영 부자는 이천 관아(전 이천경찰서 자리)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과 애국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일본경찰로부터 애국동지명단의 공개를 강요당했으나 저들을 힐책하고 굴하지 않았다.
일본경찰들은 비분하는 부자의 팔다리를 칼로 찌르고 심한 고문을 자행했으며 결국 이천 장터 홰나무 아래 묶인 채 父子가 함께 당시의 관아 서편 작은 언덕(창전동 365번지)에서 총살 당하였다. 이날이 1907년 8월 24일(음력 7월 16일)로 그 때 구연영의 나이 44세였으며 아들 정서의 나이는 25세였다.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고 아들 정서에게는 1991년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구연영은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감리교의 자랑스러운 순교자이며 이천의 의기를 드높인 순국열사이다. 구연영, 그 이름은 순국의 높은 뜻과 함께 이 땅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2007년 8월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천중앙감리교회 남선교회 연합회가 뜻을 모아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