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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4학년 재학 중 한일합방 이후 한민족의 얼을 말살하고 내선일체라는 사상을 강제로 주입시키려는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기 위해 1931년 11월 동맹휴학을 주도하며 단식투쟁을 하다가 강제퇴교당하셨다. 지사께서는 이에 굴복치 않고 애국일념은 더욱 불타 당지역 동지 정행돈 이두석 박몽득 뜻을 같이하는 청년 70여명을 규합 청년동지회를 결성하여 일제에 항거하며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우선 민족을 깨우쳐야 된다는 신념으로 농촌계몽과 민중계도에 진력하셨고 청소년 육성을 위해 야학을 열어 글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항일구국운동 내지국권 회복운동에 심혈을 기우리셨다. 1938년 2월에 이 사실이 발견 왜관경찰서에 체포되어 대구서로 이송 왜경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며 2년간 옥고를 치르신 후 1939년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하셨으나 계속 숨어서 활동하시다가 다시 구속되어 갖은 고초를 겪으시며 1941년 3월 7일 석방되셨다. 일제 치하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에 한계를 느끼신 지사께서는 곧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셨다. 1944년 귀국하셨으나 즉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재수감되셨다가 1945년 8월 15일 몽매에도 그리시던 해방과 더불어 석방되셨다. 인생의 황금기인 20대에 오로지 조국의 광복만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셨던 지사께서는 해방 후의 조국이 또 남북으로 분단되고 6.25사변이 야기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직시하시고는 완전한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국력을 길러야만 된다고 생각하시어 일제치하에서 모든 것을 박탈당해 피폐해진 농촌을 복흥시키려고 각고 노력 끝에 선진영농법을 연구 농민들에게 교육함과 동시에 외국으로부터 선인장의 묘목을 수입 개량하여 전국 화분 농가에 보급 수출토록 함으로써 농가소득증대는 물론 화분 농산물 수출의 효시가 되었다. 1977년 2월 3일 국가에서는 지사에 대하여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이 있었으며 1990년 다시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서훈되셨기에 일편석을 세워 지사의 거룩한 생애를 기록으로 남겨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