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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학교와 감리교 신학교들의 교직을 겸임하기도 하시었으니 이 여러 학교에서 공의 가르침을 받은 실로 여러 만이 될것이다. 그러는 한편에 "한글" 편집을 홀로 맏아 출판하기에 골몰하시는 가운데 그 씀이 부족하면 사전을 들여 발행을 계속하기도 하고, 혹은 전당을 잡히거나 저작권을 팔아 보태기도 하였으며 또 동아일보 조선일보 그 밖의 신문과 잡지들에 글을 실어 새 맞춤법을 널리 펴며 혹은 선조들의 끼친 문화의 역사를 소개하였고 또 사전 편찬에도 종사하였다. 청백한 공은 끼니가 없어도 태연하였다. 그리고 공은 늘 빈곤한 중에 값없이 또는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일만 많이 한 탓으로 떄로는 빈혈증으로 졸도도 하고 때로는 각혈로 넘어지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아무 갚음이 없고 빈곤만이 따르는 공에게 또사디 액운이 닥쳐왔다. 4270년 6월 7일 등우회와 흥사단 사건으로 검거의 선풍이 일게 되자, 공은 서대문 감옥에서 한 해 동안 욕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 두번째 영욕의 고초다. 그러나 공은 출옥하자 곧 대동출판사에서 출판물의 글과 맞춤법을 바로 잡는 일에 힘을 다하였고, 기 뒤 기독신문사의 주필이 되어 떨치지 못하는 교역자를 일깨우며, 여위어 가는 신자들의 넋을 순결하게 하는 동시에 일반 사회보다 뒤진 교회 출판물의 한글 맞춤법을 바로 잡기에 노력하시었다. 피 흘리지 않고 우리 조선과 만주를 삼킨 왜적은 또 중국 침략전을 일으키는 한편 우리 조선 민족을 군티 없는 일본 일본사람으로 만들어볼량으로 학교에서 가정에서 우리 말까지 없애려는 갖은 압박과 잔인무도한 악정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4275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는 이 학정에 유린을 당하게 되자 공은 그 중심 인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갿히게 되었으니 이 세번째 누설의 욕이다. 1년을 하루 같이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되었으나 공은 오히려 웃음으로 악마 같은 그들을 타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은 그 악형과 고초로 말미암아 점점 쇠약하여졌던 것이다. 그 리하여 그 다음 해 9월 13일에 함흥감옥으로 옮기게 되고 또 예심에서 불게 되던 그 해 겨울 곧 4276년 12월 8일 찬 바람이 살을 에는 감옥 독방에서 병으로 고통하다가 의약은 커녕 따뜻한 물 한모금 얻어 마실 길 없이 한 많은 이 세상을 영원히 가시고 말았다. 공의 성격은 지극히 청렴하고 결백하였다. 지극히 인자하고 겸손하였다. 지극히 평화스러워 성내는 일이 없었다. 종교로는 예수교의 잘오였으며 일생 사업으로는 혀와 붓을 통하여서의 교육이었다. 인격혁신과 정치혁명을 위하여서는 해외에서 "흥사단"에 국내에 와서는 "수양동우회"에 관계하여 심력을 다하였고 국사를 통하여 조선의 넋을 살리기 위하여는 "진단학회"를 일으키었고 우리 말과 글을 바로 잡기 위하여는 "조선어학회"의 중진이 되었던 것이다. 아! 슬프고 쓰린 일이다. 공이 일생을 두고 분투노력하던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