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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겸진 선생은, 경남 진주(晋州) 사람이다. 1910년 망국 후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던 그는 3·1운동이 일어나던 무렵 유림(儒林)측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한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피체되면서 발각되었고, 이로써 많은 유림들이 일제에 피체되어 고초를 치렀다. 이후 1926년 김창숙이 독립군기지 건설과 군사양성을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운동을 전개할 때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6년 1월 군자금 모금차 중국으로부터 밀입국하여 활동을 벌이던 김창숙 등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김창숙의 활동을 지원하던 중 1927년 2월 이 일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피체되어 고초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