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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운포 이중린선생 사적비
선생의 자는 진백 호는 운포 본관은 진성이다. 퇴계 이황선생의 12대손이며 청벽 수연공의 6대손으로서 1838년 10월 9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할아버지 운산 위재공은 청풍부사 홍주목사 호조참의 동지중추부사 한성우윤등의 내,외적을 역임하였으며 병인양요 당시 경상남도 소모사로서 의군을 모집하고 양이를 성토한 바 있다. 아버지 석포 만시공 또한 산청현감 의금부도사와 금산, 군위, 김천등 고을의 군수를 역임하며 척사를 표방하였다.
이와같은 부조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선생은 1874년에 위정척사의식에 따른 '대원군 봉환상소'사건으로 안동부 옥사에 갇힌 일이 있고, 예천 용궁에 정배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1886년 민시일파가 국정을 농단할 때는 조정과의 불화로 함경도 길주, 명천 지방에 4년간 유배당하기도 했다.
1895년 8월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1월 단발령이 내리자 12월에 '청진왜소'라는 상소문을 올려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이듬해 1월에는 '창의기고일방사문'이라는격문으로 의군에 동참할것 것을 호소하니 뜻있는 많은 청장년들이 의거에 참여했다.
1895년 12월 의병항쟁과정에서 공이 결성하여 부장으로 재임중이던 제1차 예안의진이 허물어질 즈음에는 가산을 과감히 정리한 자금으로 청량산에서 진영을 수습하고 재정비한 다음 그 대장에 추대되어 직접 의군을 지휘하였다. 1896년 3월에는 예안,안동,봉화, 영주, 순흥등 7읍의 연합의진 군사300여명을 총지휘, 당시 경북 함창 태봉에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다해서는 일본이 총검으로 윕협하며 은사금을 내렸으나 완강히 거부하고, 통분한 끝에 입산가를 짓고 채미가를 부르며 천부산, 청량산, 속리산과 풍산, 용궁, 문경 등지에 피신 은거하면서도 나라잃은 슬픔을 토로하는 등 항일운동을 지속하다가 1917년 2월 11일 향년 80세에 서거하였다.
선생은 위와같이 시종여일하게 대일항쟁을 한 공적으로 2007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니 참으로 때늦은 일이라 하니핤없다. 그럼에도 이 사적비를 세우는 까닭은 단순히 선생의 공적을 기리려는 것 보다는 후생들에게 사람이 사는 참뜻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려 함에 있는 것이다. 아! 선생의 위군헌신이 어찌 자신이나 가문의 영예를 염두에 두고 행한 일이었겠는가. 거룩하도다 선생의 생애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