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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장단/사천강지구 전투는 1951년 8월 정전회담이 개최딜 당시, 공산군에게 두번(1950년 6월 28일, 1951년 1월 4일)이나 수도 서울을 빼앗긴 경험이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 강원도 양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해병대를 격려하기 위하여 방문하였을 때, 다시는 공산군에게 서울을 내어 줄 수 없다는 의지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며 서울을 탈환했던 최강부대인 한.미 해병대가 수도 서울을 방어하도록 미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에게 요청하여 수행한 전투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 수도 서울방어에 역점을 둔 미8군 사령관의 전투부대 재배치 계획에 따라 대한민국 해병대는 미 해병 제1사단과 함께 1952년 3월 17일 서부전선 임진강 북쪽 장단, 사천강지구로 이동하였다. 당시 전방의 적은 중공군 제19병단 제65군단 예하 제193,194,195사단및 제8포병사단으로 총 4망 2,000여명이 20고지 이상의 공격에 유리한 지형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 해병대 제1전투단은 5,000명은 100고지 이하의 방어에 불리한 개활지에서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작전을 실시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776명의 전사자와 3,21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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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해병대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시 까지 중공군의 네 차례 대규모 공세를 상승불패의 전통과 호국충정 해병정신으로 저지 격퇴하여 군사분계선을 임진강 북쪽으로 유리하게 형성하였고, 경기도 북부 및 수도 서울 방어와 안전보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전협정 이후 해병대 제1전투단은 제1여단(1954년 2월 1일)과 해병 제1상륙사단(1955년 1월 15일)으로 증편되었고 1959년 3월 12일 국가전력 기동예비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해병 제1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재배치할 때까지 8년 동안 개성-문산 축선과 장단/사천강-김포반도-강화도-교동도를 연결하는 서부전선에서 수도 서울을 굳건히 방어하였으며, 현재도 해병대가 수도 서울의 서측 관문인 김포반도와 서측도서를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 해병대는 6.25전쟁시 장항.군산.이리지구 전투를 시작으로 통영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 도솔산지구전투와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드에서 선배 해병들이 창조한 '귀신 잡는 해병', '무적해병'의 혼을 계승하여 국가전략기동부대로서 상시 출전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또한 재난구호활동및 국제평화유지작전 등을 통하여 국격향상과 세계평화에 기여함으로써 국민과 국가으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공지기동 해병대로 거듭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