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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린선생은1895년 음력 12월 11일 이만도를 창의장으로 하는 선성의진(宣城義陣)의 부장으로 참여하였으며, 1896년 음력 1월 4일 제2차 선성의진, 즉 청량의진(淸凉義陣)의 대장으로 재기하여 태봉전투(胎峯戰鬪)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북 북부 지역의 을미의병은 1895년 음력 12월 6일 안동의진(安東義陣)을 필두로 예안·청송·진보·영양·영덕·영해·영주·봉화·순흥·풍기·용궁·예천·의성 등 14개 군에서 일어났다. 안동지역에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첫 통문은 이만응(李晩鷹)·금봉술(琴鳳述)·목사 이만윤(李晩允) 등 223명의 이름으로 작성된 예안통문(禮安通文)이다. 선성의진, 즉 예안의진은 이 예안통문을 바탕으로 성립된 의병진이다. 대장 이만도, 부장 이중린을 중심으로 1895년 음력 12월 11일 창의한 선성의진은 안동의진이 경병에 무너지자 곧 해산하고 말았다. 1896년 음력 1월 4일 제2차 선성의진, 즉 청량의진(淸凉義陣)의 대장으로 재기한 이중린은 김도현을 중군으로 삼아 7읍 연합의병진의 예천회맹에 참여하였다. 이때 선성의진의 진용은 대장 이중린, 중군 김도현, 선봉장 이인화(李仁和), 전방장 이중언(李中彦), 참모 이빈호(李彬鎬)·이중엽(李中燁), 종사 이장규(李章奎) 등으로 구성되었다. 1896년 음 2월 16일 아침부터 시작된 7읍 연합의병진의 태봉공격은 저녁 무렵까지 전개되었으나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태봉전투 이후 선성의진은 예안지역을 방어하였으나 관군이 들어오자 청량산으로 진용을 옮겨 활동하였다. 이중린은 1896년 음력 4월 29일 선성의진을 해산하였다. 그 후 이인화가 재차 창의하여 선성의진을 지휘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