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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공 도찰사 환직의 받들은 의대소에 좇아 영천에서 거의하였다가 행군도중 정공은 적상에 속아 피체하매 이공한구 의중은 대신 거느렸던 터라 이공은 곧 김공을 도총장에 공을 부총장에 임하여 항전을 같이 하였다. 이윽고 정공이 출옥되매 다시 그를 받들어 싸우다가 정이 양공의 전순후 도찰사공을 받을어 싸웠으며 도찰사공이 또 피체 취순후 최공 세한을 받들어 싸웠으며 최공의 피체취순후 이공 세기를 받들어 싸웠더니 이공이 또 피체취순하였다. 그는 오히려 굽히지 않고 스스로 패병을 거느렸으나 대세 이미 그렀다 융희3년 9월 그 고리 청송현 서수락동에서 불의포습을 받아 사로잡혀 참형혹문을 갖추 받은 다음 그 익년인 이 나라의 병탄되던 경술 7월 10년형을 받았다. 출옥후 적경의 백안을 피하고 여독의 숙고를 다스리러 달부에 교거중 또 광복동지를 은치한 일로 4년형을 겪으니 동지들도 거의 순사 무명 구옥 또는 부상으로 일 들 길 없고 그도 뜻 비록 확삭(矍鑠)하였으나 몸 더욱 애체하여 비육의 탄을 금치 못하다가 을유 적의 항복을 보고 무술12년 29일 장서하여 처음 현서당동미개등간좌에 장하였다가 이제 이에 천장하였다. 배 김녕 김영만의 녀로 공에 앞서 갑신 2월 16일 졸세하여 갈천동 팔반등우좌에 장하였다. 5남을 두어 병칠은 출후하고 병구 병대 병오 병철이오 별칠의 남 장희 병구의 남 한삼 병대의 녀 신성준 남호일 병오의 남 청수요 그 다음 어려서 다 적지 않음 색각건대 그들이 힘의 지징지약함을 불원하고 막강막대한 적을 대하여 어찌 일시의 공을 자기하였으랴. 오직 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