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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공군 개입과 1.4후퇴 - 중공군의 참전 / 흥남부두로 모여든 피난민들 대한민국 국군 및 UN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북한의 김일성은 불안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을 만나 지원군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고 중국인민지원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다. 대부분의 기록에 의하면, 넘치는 의용군을 바탕으로 인해전술로 공격해왔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 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에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12월 4일에 평양철수를 하고 이어 북한은 12월 6일에 수도 평양을 되찾았다. 한편, 12월 9일부터는 UN군이 원산을 철수하였고,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새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2월 이승만은 38선은 조선인민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국-만주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휴전은 안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동부(강원도 쪽)에서 중국인민해방군과 조선인민군이 강릉까지 밀고 내려오자, 유엔군은 이 전선을 지원 방어하였고, 좀 지나자, 유엔군은 전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인민해방군, 조선 인민군이 뒤로 크게 밀려,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은 방어선을 쳤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휴전선이다. 하지만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소련이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다. 이제부터 한국전쟁은 국제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