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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초등학교와 목포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나 집안이 가난 하여 더 이상 진학을 못하고 학업을 중단하였다. 돈벌이를 위해 부산으로 갔다가 여의치 않아 군입대를 하였다. 군제대 후 동지는 또다시 돈벌이를 위하여 서울로 상경하였으나 그것도 여의치않아 고향으로 다시 내려왔다.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결혼하여, 가난했지만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80년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자 동지는 하던 일을 제치고 광주민중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지는 기독교 농민회에 가입하여 농민이 사람답게 사 는 세상을 만들어보고자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동지는 ’86년 7월 4일 무안의 마늘싸움과 ’87년 양파마늘 싸움에서 선봉에 서서 열심히 투쟁하였다. ’87년 12월 20일 무안에서 대통령선거 무효투쟁에 참가하고, 오후 5시경 무안읍에서 광주 방면으로 행진하다가 경찰과 충돌하였는데 그 과정 에서 논두렁에 빠진 동지에게 경찰은 무수히 구타를 하였다. 군화발로 뒤통수를 밟고, 옆구리 등을 군화발로 차는 등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하였다. 이후 경찰서장 이“구속을 안시킬테니 폭행당했다는말은 하지 말라”며 동지를 풀어주었다. 동지는 구타로 인한 후유증으로 무안읍 유성병원을 거쳐 목포 성 콜롬반 병원 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으나 상태가 계속 악화되어 ’88년 3월 18일 광주 기독병원 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3월 25일“나는 할 일이 많은데…” 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하고 말았다. 김길호(당시35세)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54년 1월 18일 전남 무안 출생 목포중학교 졸업 후 부산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지만 실패 1972년 공군제대후 서울에서 장사를 했으나 실패 1977년 귀향 1979년 5월 우득례씨와 결혼, 슬하에 1남 1녀를 둠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에 참여 이후 기독교 농민회원으로 활동 1986년~1987년 7월 4일 ‘마늘, 양파 생산비 보장 및 전량수매 촉구대회’때 선봉에서 활약 1987년 3월 3일 부정선거 규탄 및 선거무효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오후 5시경 무안경찰에 잡혀 군화발, 자전거 체인 등으로 집단구타 당함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르게 됨) 1987년 12월 24일 구류 5일을 살고 풀려나옴. 이후 통원치료 1988년 3월 15일~25일 광주기독병원 입원 1988년 3월 25일 병세가 호전되지 않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끝내 운명 끝내살리라 |439| |43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노태우정권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