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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호 희생자 충혼탑. 이곳에 보신 분들은 6.25 자유수호로 전쟁시 지역 애국지사들로 당시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애국활동을 하시다 목숨을 바친 공주지역 분들이다. 이분들을 추모하고 한민족으로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애국영렬들을 모신 충혼탑이다. 6월이면 생각나는 이분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공주읍장과 교정선생님, 경찰과 교도관, 애국 청년단과 자율소방대원 특히 순수한 민간인들의 희생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희생자 200여위 중, 타 지역과 무 연고자를 제외한 고증과 연고가 확실한 186위를 이곳에 모셨다. 그러나 아직도 대추골 산자락엔 연고가 없어 발굴하지 못한 무명 애국인사들이 잠들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희생 당시 상황은 인민군이 천안을 거쳐 정안면 지역을 통과할 당시 미군은 금강철교를 폭파해 도강하는 탱크가 금강모래턱에 박혀 저지에 성고하는 듯 하였으나, 결국 우회한 인민군에 큰 희생과 함께 전라도 지역으로 후퇴를 하였다. 이때 애국활동을 하시던 우익인사 80여명은 인민위원회(공주경찰서)에 수감되었고 각 지역마다 인민군이 투입되어 횡포가 시작되었다. 그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들이 퇴각 하루 전 무자비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시신더미에 깔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3명중 박씨의 증언과 또 김씨(당시 16세) 어머님과 함께 형의 시신을 찾기 위해 확인 결과 사신 한구에 10여발씩 총을 맞아 피가 흥건하였다고 한다. 결국 형의 시신은 얼굴은 알아볼 수 없고 특이한 발가락으로 확인, 가매장 후 이장하였는데 여우가 안 건드린 사신이 없을 정도라고 하니 그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인민군이 이인, 탄천면을 거쳐 남하할 당시 쑥을 뭉쳐 불을 밝혀 위치를 알려주었다는 밀고로 그 지역 인사들이 많이 체포되어 학살되었다. 탄천면 화정리 공회당에서 윤애중씨가 1950년 6월 29일 같은 마을 좌익에 의해 학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30일에는 윤덕병, 윤남중씨 등 9명을 뱀골 법령에서 살해되어 시신도 찾지 못하였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윤상만, 이병장, 윤호중등을 총으로 살해하고 달아났다. 6.25전쟁 전부터 좌우익으로 동네사람끼리 심하게 싸우는 일이 있었다. 또 애국청년단 장기면대 대장 문흥범, 양재룡, 부대장 고일동, 훈련부장 박기준, 재무부장 최기준 외 대원 30여명은 반공활동, 의용소방대, 치안 유지 활동등 애국 활동을 하다 인민군이 들어오자 전북 완주군 운주면 대둔산 지역으로 대원들과 피신하였다가 좌익인 이웃의 밀고로 7명이 체포되어 장기면 위원회 수감 후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하봉리뒷산(장기중학교)에서 총살되어 30대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특히 이들 7인은 총살직전 마지막 할 말을 하라고 하자 대한민국 만세를 불러 인민군의 총개머리로 맞아 앞니가 전부 부러진 채 총살되었다. 수복 호 밀고했던 남도당원의 증언으로 시신을 찾아서 후손에 전해졌다. 이외에도 장기면 금암리 이모씨 어린이포함 7명, 정동산 제천리 한모씨외 6명, 봉안리 최모씨 부부, 소미에 윤모씨 대교에 이모씨 가족 6명, 은영리 능골 일가족외 남양분유 앞 타파리 고개 집단학살 등 인명피해가 큰 지역이지만 유가족이 없어 안타깝게 발굴되지 못하였다. 또 우성, 사곡, 신풍, 유구, 반포, 계룡 면단위 지역도 희생자가 많은 것을 기록이 소실되어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크다. 남북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앞둔 이 시점에서 왜 지난 일을 거론하는지 반문하는 사람도 있게으나 애국인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고서는 결코 평화통일을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익이든, 좌익이든 전쟁의 희생자이므로 이런 사실을 교훈삼아 다시는 전쟁이 없도록 평화적 통일을 이룩해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