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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국군의 38도선 돌파 북진 - 다시 중앙청에 계양된 태극기 / 38도선 돌파를 기념하고 있는 국군과 미군 15일 새벽 유엔군과 국군 해병대가 맥아더 장군 지휘로 인천에 상륙,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이 있자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된 민족부위상인 최용건은 최후 저항을 시도했으나 20일에 유엔군 수색대는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했고, 23일에는 한국군해병대와 미 제1해병사단이 서울 서북방의 안산을 점령하고 다음 날 시내로 돌입했으며, 25일에는 한국군 제17연대와 미 제7사단이 한강을 도하하여 남방으로부터 시내로 돌입, 협공으로 맹격을 가했다. 드디어 9월 28일 역사적인 서울 탈환이 이루어져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올랐다. 서울을 완전 탈환한 유엔군은 다시 수원 방면으로 남하하여 적의 배후를 찔렀으며, 중부와 동부전선에서도 무제한 북진공세를 취하니 30일에 벌써 국군 제30사단은 동해안을 전격적으로 북상하여 38선 접경 인악리에 이르렀다. 이에 38선 이남의 공산군은 사실상 퇴로마저 끊긴 채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졌다. 9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북한 공산군 총사령관 김일성에게 항복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하고 다만 남한지역에 있는 공산군의 전면 퇴각만을 명령했다. 따라서 같은 날 유엔군 사령부는 휘하 전장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했고 1월 1일 오전 11시 45분 국군 제3사단은 이종찬 대령 지휘하에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되었다. 19일 한국군 제1사단을 선두로 하여 평양을 완전 점령했다. 한편 서부전선에서는 10월 20일 청천강 이남 숙천 일대에 미 제11공정사단의 약 4천명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 적의 후방을 공격하였으며, 국군 제6사단이 미 제24사단과 영국 여단의 서해안 진격과 보조를 같이하여 덕천.희천 등지를 거쳐 서북 국경의 중앙지점인 초산으로 진격, 26일 오후 5시 50분 6사단 제7연대 수색대가 압록강에 이르렀다. 11월 21일에는 중부로 진격한 국군 제7사단의 일부가 중부국경 혜산진에 도달했고, 동부전선의 수도사단과 3사단은 원산에서 다시 북진하여 10월 17일에 함흥, 22일에 북청, 28일에 성진을 점령했으며, 여기서 제3사단은 길주를 거쳐 백두산을 향해 합수로 진격하고 11월 25일 수도사단은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 청진에 돌입했다. 이로써 국토의 전역이 거의 수복되고 통일이 목전에 다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