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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학문에 힘쓰며, 미-음과 마음을 합하고 힘괴- 힘을 아울러 우리 자주 독립을 회복할 지어다 아울러 우리 자주 독립을 회복할 지어다 그러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겠노라. 아! 조금이 라도 희 망을 잃지 말라.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한다 다. 최익현[崔효鋼 한말의 유학자·애국지사. 第-編 순국열사 및 독랍운동가 • 23 (1) 공적 [1833(순조 33). 12. 5 경기 포천 출생 - 1906(광무 1이. 12. 30 일본 쓰시마 섬 [對馬島]에서 단식 순국]. 보관은 경주(慶州) . 아맹은 기남(奇몇). 자는 찬겸(贊訴) , 호는 면암(때챈) 아버지는 대 (1-사)이 며, 어 머 니는 경주이 씨(慶州쭈民)이다 9세 때 김기현(金倚鉉)에게 유학의 기초를 배 우고, 14세 때부터 이 항로(李벨老) 문하에서 공부했다 1855년(철종 6) 맹경과( I꺼經科)에 급 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지아짧知承文院副IE字)가 되었으며 이어 순강원수봉관(JI頂康園守奉 '11')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이조정랑-신창현감(新섭縣藍) .성균관직강 등을 지냈다 1866년 (고종 3) 어머니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후 1868년 9월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그해 10월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럼정책(聚했政策)의 혁파, 당백전(當百錢)의 폐지, 사대문(四大門) 문세 (門脫)의 폐지 등을 주장하며 대원군의 대내정책을 비판했다. 이 상소로 사간원의 탄 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곧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양주 직독(直짜) 으로 내려기- 학문에 힘썼다 1873년 승정원동부숭지로 임명되자 사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대신을 비롯한 관리들과 성균관 유생들이 그를 극렬히 비난했으나 당시 친정(親政)을 생각 하고 있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호조참판에 임명했다 그해 11월 다시 상소하여 앞서의 상소내용을 부연설명하면서 만동묘(파짜l웹)의 칠폐를 비 롯한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 하고, 하야를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10년간 집권해온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소문의 문구 가운데 지나치게 과격한 내용이 있어 삼사(三司)를 비 롯한 대신들의 탄핵으로 국문(렘問)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 I렘節갓웬)되었으며 1875년 2월 풀려났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위 정척사론) 그는 이 상소에서 첫째, 일본과의 강화(調:和)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무비(武備)를 갖추지 못하여 고식책으로 강 화를 추진한다면 앞으로 적의 무한한 탐욕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며, 둘째, 일본의 물화(찌 貨)는 모두가 요사기완(擺著奇玩)으로서 우리나라의 유한한 농업생산품으로 적의 무한한 공업생산품과 교역하게 되면 반드시 경제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며, 셋째, 일본을 왜(優)라 고 일컬었으나 실은 양적(洋빼)과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일단 강화가 성립되면 금수와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