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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성군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접면인 회화면까지 사전연락을 하여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해서 3월 20일 구만면의 국천 모래사장에서 군중과 함께 봉기하고 그 선두에 서서 열렬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3월 21일 「한인관리 퇴직권고문」을 구만면 면사무소에 첨부하고 다음날 동권고문을 각 도·군의 관공서에 발송하였다. 일제가 사후에 조사한 결과 3·1운동의 주동자로 지목하여 체포하려 하므로 피신하였다. 1920년 일본으로 가서 동경에서 재일동포들을 규합하여 동흥노동동맹을 창립하고 친일단체인 상애회에 대항하여 1932년까지 투쟁하는 한편, 서상한·이혁·변영우등과 함께 월간잡지 「노동」을 발행하여 일본과 국내에 배포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5월 22일에 출판법 위반으로 벌금 40원의 언도를 받았으며, 1926년 11월 30일 소위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과 벌금 30원을 동경구재판소에서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