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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호는 경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1925년 3월(음) 북경(北京)에서 김창숙(金昌淑)·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 등이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내몽고(內蒙古)지방을 개간하여 그 이익금으로 무관 학교를 설립하고자 계획하였다. 또한 독립군은 둔전제(屯田制)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김창숙·김화식 등이 만두 장사로 변장하여 1925년 8월 국내로 들어와, 충청·경상도 지역의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20만원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1926년 4월에는 상해로 탈출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경북 영주에 있는 본인 집에서 일경에게 피체되었으며, 1927년 3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송재호는 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1925년 6월 무관학교 설립자금 모집을 위해 북경에서 입국한 제2유림단(儒林團)의 핵심인 형 송영호(宋永祜)와 함께 활동하면서 본인 소유의 논 1,300여 평을 매각한 대금 600원을, 형을 통해 김창숙(金昌淑)에게 군자금으로 송금하였다. 1926년 2월 일경이 형 송영호로 오인하여 피체되었으며 심한 고문을 받다가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생명은 건졌다. 그후 부인 유임이(柳任伊)도 비명횡사케 되어 더욱 항일의식이 고양되었다. 1927년 9월 영주군의 신간회(新幹會) 영주지회 회원 및 영주청년동맹(榮州靑年同盟) 집행위원으로 항일의 선봉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 3월 7일 일경에 피체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1년 국내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탈출,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봉천성(奉天省) 안동(安東)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2개월의 구류처분을 받은바 있으며 서울 팔판동(八判洞) 등지로 이주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