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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천상륙작전 - 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장군 / 인천항으로 돌격하는 한국 해병대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쟁이 발발한지 4일 지난 뒤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조선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미국 해군은 인처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구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의 일부 인사들이 작전 성공률이 1:5000 이라고 격심하게 반대하는 와중에,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인청상륙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8월 28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었다. 상륙작전은 동해에서 미군함 미주리호로 삼척 근처에서 상륙작전 준비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되었으며, 서해에서는 서해 최적의 상륙지점으로 간주된 군산시에서도 상륙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작전으로 시작되었다. 9월 4일 상륙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됐고, 상륙 당일인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다. 9월 14일에는 영덕군에 장사 상륙 작전이 실시되었다. 이와 동시에 맥아더는 군산에 상륙할 것이라는 거짓정보를 흘렸으며, 이 정보에 속아넘어간 인민군들은 군산의 방어를 강화하면서 다른 지역의 경계가 허술해졌다. 9월 15일, 작전개시일에 함정 206척, 7만여명을 동원하여 영종도 근처에 집결, 작전이 시작되었다. 북한 공산군 해병 제266독립연대 3대대와 제918포병연대 소속병력 등 400여 명은 처음에는 산발적인 저항을 하기도 했으나, 유엔군의 화력에 압도되어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유엔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내륙으로 진입, 9월 16일 밤에는 예정된 교두보를 확보하고 계속해서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다. 인천상률작전은 서울을 쉽게 되찾을 수 있는 길을 터놓았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된 북한 공산군 주력 부대의 병참선을 일시에 끊어 버림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를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