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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민 (당시25세) 용인 가톨릭 묘지에 안장 1967년 8월 부산 출생 1986년 3월 숭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입학 1987년 6∙10 항쟁시 시위도중 3도 화상 입음 1988년 기독학생회 회장 역임 1989년 총학생회 집행부 역임 1989년 12월 군입대 1990년 3월 제적 1990년 9월 의가사 제대 1991년 미등록 제적생 복적 대책위 위원장 1992년 4월 2일 총학생회 산하 미등록 제적생 복적 대책위로 등록금 투쟁 중 과로로 입원 1992년 4월 28일 40여일의 투병 끝에 운명 |43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노태우정권 학생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우뚝서 치열한 삶을 살다 갔다. 동지는 군에서 얻은 병으로 제대한 후‘일반휴학 후 군입대하여 휴학기간이 초 과되었다’는 이유로 제적당하였다. 이에 동지는‘미등록 제적생 복적 대책위’를 구성하고 ’91년 2학기까지 1년 여 동안 복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찬바람과 이슬 을 맞으며 농성하는 과정에서 학우들이 처음의 심정적 동조에서 점차 학교당국 의 반인륜적이고 비민주적인 학사행정에 분노하며 함께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 다. 그러나 학교당국이 문제해결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겨울방학이 되어 농성을 해산할 수밖에 없게 되자, 장기항전을 결심하게 된 동지는 ’92년 학원자주 투쟁 에서 미등록 제적생 전원 복적 요구와 비민주적 학사행정의 개선을 위해서는 재 학생과 함께 하여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록금 투쟁에 적극 동참하였다. 추운 겨울 2월에서 3월 중순까지 동지는 학생회관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다. 새 벽까지 토론해서 마련된 내용을 다른 간부들이 피곤에 지쳐 잠이 들면 동지는 남 아서 다음날 유인물 작업을 하였다. 학생들이 3월에 받아 본 유인물의 대부분과 대자보, 정문앞 벽글씨는 90%이상이 박현민 동지가 밤새 쓴 것이었다. 동지의 그런 노력은 등록금 투쟁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동지는 결국 과로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운명하고 말았다. 동지는 유고시집「나는 출입금지구역에 누워 있었다」, 「그물 속에서 헤엄치는 방법」과 마당극 대본「아리랑 공화국」, 「1992년 신예수뎐」을 남겼다. 끝내살리라 |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