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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城大捷碑(연성대첩비)
임진년(1592)에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해 북상했습니다. 우리의 방비는 미약했으나 통제사 이순신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해전으로 왜군의 기세를 꺾었고 절도사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분투하여 충절을 다했으며, 초토사 이정암은 의병과 함께 연안성을 지켜냈습니다. 또한 원수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승리하였고, 명의 제독 이여송은 평양성의 왜군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개성을 탈환함으로써 3경(평양, 개성, 한양)과 8도를 수복했습니다. 살펴보건대 故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이정암(1541-1600)은 지난 날 주상께서 몽진할 때 호종했는데, 개성류수로 있던 공의 아우 정형이 형과 함께 개성을 지키겠다고 주청하였고, 임진강 방어전에서 실패하자 공은 그 해 8월 22일 연안부로 넘어갔습니다. 송덕윤, 조광정등이 의병 1백여명을 모아 반겨 맞으며 말하기를, 공께서 부사로 있을 때 은혜를 베풀었던 이 곳을 지켜달라고 하여, 공이 싸워 죽을 곳을 얻었노라 하고 의병5백여명을 모아 각자에게 임무를 분담시키고, 가마솥을 걸어 노약자들도 구휼했습니다. 28일, 적장 나가마사는 재령. 신천. 해주를 함락시킨 데 이어 3천여의 병력을 몰고 연안성으로 쳐들어오니 사람들이 놀라 성밖으로 두주하려했습니다. 공은 사수를 결심하고 겁을 먹은 사람은 출성해도 막지 않겠다하니 다들 감격하여 힘껏 싸울 것을 다짐했습니다. 저녁 무렵 연안성의 방어태세를 살피던 적의 선봉을 중문장 장응기가 화살로 사살하자 왜군은 성서쪽에서 대포와 불화살을 쏘아 성내의 초가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했지만 때마침 풍향이 바뀌어 불길이 성밖으로 건너뛰자 적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적은 막사를 헐어 해자를 메우며 개미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자, 공은 섶 위에 앉아 아들 준에게 성이 함락되면 섶에다 불을 질러 아비가 자진할 수 있게 하라 명하자 모두가 감읍하며 죽을 각오하며 죽을 각오로 나흘간 맞서 싸우니 적의 과반수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적은 전사자의 시체를 모아 불사르고 다음날 아침 포위를 풀고 패퇴하였고, 아군은 적이 남긴 시체 18구를 구덩이에 묻고 우마 90여필과 군량미 130여석을 노획했습니다. 이 대첩으로 연안 이하 13주가 회복되었으며, 아산, 강화, 용강으로 이어지는 서해의 물길이 열린 것은 공의 힘이었습니다. 공의 본관은 경주이며 21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문장은 세상을 울렸으며 국란에 무훈을 떨쳤으니 문무겸전의 장부입니다. 이 비석은 좌의정 이항복이 짓고, 대사헌 정사호가 썼으며 상호군 김상용이 전자하여 선조 41년(1608) 5월에 세웠습니다.
연백군 모정리에 있던 이 비는 실향민이 망향단(양사면 인화리)에 의사 편강렬 추모비와 같이 건립했던 것으로 2009년 8월 19일 이 곳 평화전망대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