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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편액들이 걸려있었다. 편액중에 한글로 된것이 있었다. 편액이라기 보다는 안내판이다. 이 비는 景宗二년(四○五五년) 8월에 세워진 충무공유허비인데 吳重周가 통제사 때에 시작한 일을 公의 五대손 李鳳祥이 뒤에 통제사로 부임하여 완성 시킨것이다 그리고 碑文은 南九萬이 지었고 글씨는 趙泰耉의 쓴 바로서 그 뜻은 대강 마음과 같다. 단기四二九三년 四월 무안교육구교육감 옛날 宣祖대왕 丁酉년에 忠武公이 전쟁에는 군량이 소중하다하여 이곳 高下島에 곡식을 쌓아 두고 둔을 치며 别将을 두어 주관케 하였다 그런데 이섬은 바닷길목이라 바른편으로는 嶺南을 끼고 왼편으로는 서울까지 터진지라 일선 싸움터에 군량을 대기가 쉽고 멀리로는 피란해 계시는 임금께 양식을 바치기에 편리하니 그 나라를 위한 꾀와 근심이 범언치 않도다 세월이 흘러 사적은 무너지고 규모조차 문란해져 別將이란 이름뿐이요 군사와 백성은 흩어지니 또 진을 唐串에 옮기게 되었으나 옛날의 권세도 없어지고 곡식과 재물도 적어져서 백성들의 탄식함이 오래거늘 이때 통제사 吳重周가 軍民의 뜻으로 高下島에 비를 세워 公의 옛 제도를 복구시키고자 하였으나 돌만 다듬에 놓았을 뿐 해직이 되어 가고 말았다. 그러나 軍民의 소원은 그치지 않아 남은 비용으로써 碑文을 새기고자 나를 찾아 왔기에 나 탄식하나니 그럴 일이다 公의 원대하신 경륜이여 자고로 전쟁에 이김은 군량의 저축에 힘입지 않음이 없으니 옛 趙營平이 金城의 羌을 부숨도 關中의 屯田에 있었고 唐나라 德宗이 奉天에서 주림을 면함도 韓洸이 실어온 쌀의 덕분이었으니 公이 여기에 진을 세운것도 그 뜻이 이에 있도다 혹자는 말하되 「적과 싸울때의 군량 걱정은 누구나 할 일이나 조정에 바칠것까지 어찌 생각 했으리요」 하지만 公의 하는 일이 눈앞의 일에만 그치지 않았으니 처음으로 全羅左水營을 맡았을때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하심을 듣고 쌀 五백석을 봉해 두고 이 르기를 「임금이 義州에 피란해 계시니 平壤의 적이」서쪽으로 쳐들어가면 임금은 다시 압록강을 건느실터라 나의 직분으로 바다에 임금을 모셔 나라를 회복하거나 불행이면 君臣이 같이 내나라 땅에서 죽어도 가하다」 하였으니 이 말만으로도 어찌 公의 충성과 지략이 군량에만 그쳤겠는가 閑山島 古今島 사이에 진을 치고 돌보기 쉬운곳에 屯田을 일고 군량을 두어도 급할때 쓰기에 족할것을 하필이면 귀빠진 이곳에 서울을 바라 보고 진을 두었겠는가 통제사 吳重周가 갈린 뒤에도 역시 公의 유풍을 이르키고 公의 처음 뜻을 밝히는것은 뒤에 오는 통제사로 하여금 다시 이 자리를 닦게 함이요 이 진의 백성들이 길이 公을 사모케 함이니 또한 가상할 바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