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page


217page

파리장서(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독립탄원서)에 서명하시고 동참하심으로 세계 각국에 대한민국의 국권회복을 엄중히 청원하셨다. 하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1919년 기미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인산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민봉기와 더불어 그 일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서의 출두 통보를 받으시자 선생께선 더 이상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없을 뿐만아니라, 유의유관(선비의 의관)으로는 일제의 법정에 서지 않겠다는 굳은 결으로 1919년 음력 3월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살신보국의 길을 몸소 실천하셨다. 평소 선생께선 선비로서 마땅히 학문을 닦으며 도를 행하되 그 품은 뜻을 이를 수 없다면 마음과 몸이 욕되지 않는 온전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말씀을 누차하셨다. 그간의 내재된 수신과 수행이 없었다면 어찌 감히 살신성인의 의로운 죽음을 택할 수 있으랴! 이에 1991년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선생이 명실상부한 독립유공자이심을 공식으로 인정했다. 또한 선생의 유품 약1200점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여 영구 보관하게 됨으로써 선생의 행적과 더불어 당시 유림의 애국적 활동상황을 밣히는데도 더 없이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 묘도비는 본래 선생의 대기동 묘소앞에 세워졌으나 2009년 6월 선생의 묘소와 배위 안동권씨의 묘소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합장으로 이장하게 됨에 따라 일찍이 선생께서 태어나시고 평생을 살아오신 이곳 고향 마을에 다시 옮겨 세우게 되었다. 비록 선생의 묘소는 이제 이곳에 없으나 곳곳에 남아있는 선생의 족적과 투철한 선비정신, 숭고한 나라 섬김 정신이 대조 한강선생의 후손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와 우리의 다음세대 또 그 다음 자자손손에게 좋은 본보기로 남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간의 사정을 간략히 적어 여기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