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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성이 이범하여 일찍 조부로부터 충효의 가훈을 이어받아 성실히 실천하고 유가의 본분에 그르침이 없고 또 정의를 추구함에 남다른 불굴의 용기가 있었다. 때는 1895년 을미에 왜적의 침략의 만행은 민비를 시해하고 급기야에 을사늑약을 맺어 국권을 탈취하여 간 것이다. 공이 어찌 항일의 의분을 참을 수 있으리요. 백척간두에 선 국운을 만회하기를 하늘에 맹세하고 떨쳐 일어나니 그때가 1886년이라 동군의 최세윤 정래의 동지와 합모하고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안동으로 진군 의병장 김도화진에 합세하여 상주 함창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또 예안의 이병진 이만도 양의사와 연결하여 군무를 의논하여 많은 격려를 받았다. 1886년 단오절에 기계 인비벌에서 경주의진을 결성하고 남하하는 김하락 의장과 합세하여 총참모장으로 선임되어 6일에 안강을 거쳐 경주 황성 숲에 도착하여 곧 경주성에 입성 격전 3일간에 양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12일에 드디어 후퇴하였다. 15일 기계 달성 신광을 거쳐 흥해에 진주하여 이상태 참모 등과 청하로 진격군정을 펼다 6월 3일에 영덕 오십천에서 왜군의 정예와 격전하여 고전하다가 4일에 총지휘장 김하락 장군 및 많은 의병이 전사하고 다시 잔병을 규합하던 중에 조정에서 여러번 유사를 보내어 종용함으로 부득이 의진을 일시적으로 해산하고 은신하여 재기를 계획하다가 우연히 득병하여 1910년 7월 24일에 포항 신진 본가 산막에서 서거하니 묘는 사일 구억산 간좌원에 있다. 그 후손들은 일정의 감시를 피하여 죽장 관암 등지로 전전벽거하여 왔다. 희라, 광복이 된 지 60년이 되었다. 공의 위대한 항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