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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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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고(故)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증(贈) 좌의정(左議政) 충무(忠武) 이공(李公) 유허기사지비(遺墟記事之碑)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치사(致仕) 봉조하(奉朝賀) 남구만(南九萬)이 글을 짓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제사(議政府領議政兼弘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弟師) 조태구(趙泰耉)가 글씨를 쓰다.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세제좌부빈객(兵曹判書兼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世弟左副賓客) 이광자(李光仔)가 새기다. 옛날 선조 정유년(선조 30, 1597년)에 고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이, 전쟁이 한창 벌어질 때에는 군량 공급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서, 형편을 살펴보고 나주(羅州) 고하도(高下島)를 얻었다. 무릇 전선(戰線)의 진영(陣營)에 남아 있던 곡식을 산으로 들로 실어다가 모두 이곳에 두게 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별장(別將)을 두어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 섬은 남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바닷길로, 오른편으로는 영남(嶺南)과 닿아 있고 왼편으로는 서울길이 트여 있어서, 가까이로는 전선에 군량을 공급하여 승리를 기약하고 멀게는 행재소(行在所: 피난 중 임금의 거처)에 식량을 대어 궁색함이 없게 하고자 하였으니 국가를 위한 심원한 계책과 장구한 염려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일이 지나가자 터가 무너지고 규모가 없어져 별장(別將)이라는 옛 명색은 비록 남아 있었지만 군사와 백성이 이미 많이 뿔뿔이 도망가서 흩어졌다. 게다가 근년에는 진을 당곶(唐串)으로 옮기니 호령하던 위세는 없어진 데다 재물과 곡식을 비축한 것이 줄어드니, 본진(本鎭)에 남아 있던 백성들이 개연히 탄식한 지가 오래되었다. 통제사 오증주(吳重周)가 군사와 백성의 뜻을 모아 고하도에 처음 설진(設陣)했던 곳에 비석을 세워 일을 기록하고자 하여 충무공의 옛 제도를 회복하려 하였는데, 겨우 돌만 다듬고서 해직이 되어 돌아갔다. 그러나 군사와 백성이 이를 우러러 따르는 마음은 멈추지 않아 공사하고서 남은 재물이 능히 비석에 새기는 비용을 충당할 만하나, 얻지 못한 것은 다만 이 일을 기록한 글뿐이었다. 이 때문에 나를 찾아와 글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니, 내가 지어서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와 같구나, 충무공께서 멀리 내다보고 경륜(經綸)하던 계책이여, 옛날부터 위태롭고 어려움이 있을 적에, 전쟁에서 필승을 거두고 국가가 다시 진작(振作)함에 있어서는 일찍이 비축해 두었던 양식에 힘입지 않음이 없었으니, 조영평(趙營平)이 금성(金城)의 오랑캐를 쳐부순 것도 황중(湟中)의 둔전(屯田)이 있었기 때문이요,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봉천(奉天)에서 굶주림을 면한 것도 한황(韓滉)이 실어온 곡식에 있었기 때문이니, 공이 여기에 진을 설치한 것도 그 뜻이 진실로 이 두 가지에 있었던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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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말하였다. "공이 바야흐로 적과 더불어 싸울 적에 군량이 나날이 급할 때를 대비하여 곡식을 모아두어 군사들에게 먹이려 했다는 것은 누구라도 짐작할 바이지만, 조정에 바치려 했다는 데 이르러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지금 꼭 그러했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답하였다. "어찌 그러했지 않겠는가. 공이 했던 일을 보면 계획했던 바가 단지 목전의 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공이 처음 전라 좌수영절도사(左水營節度使)가 되었을 때, 대가(大駕: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함)했다는 말을 듣고 별도로 저장해 두었던 도정(精)한 쌀 500석(石)을 봉(封)하여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옛 이름)에 계시니, 기성(笑城: 평양(주壤)의 옛 이름)의 적이 만약 또 서쪽으로 쳐들어온다면 대가가 장차 압록강(鴨綠江)을 건널 것이다. 내 직분으로는 마땅히 용주(龍舟)가 되어 바다에 떠서 대가를 맞이하여 그길로 곧장 나라를 회복하도록 도모해야 할 것이다. 혹 불행하여 임금과 신하가 함께 우리나라 땅에서 죽어도 괜찮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공의 이 말을 보건대, 공의 정밀(精密)한 충성과 장한 전략이 어찌 다만 군량이나 모자라지 않게 하고자 할 뿐이었겠으며, 어찌 구차하게 한갓 직책만을 지키려 할 뿐이었겠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한산도(閑山島)나 고금도(古今島)의 사이에 지휘할 수 있는 곳이나 둘러보기 쉬운 곳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양식을 저장해도 급한 때에 가져다가 쓰기에 충분한데 하필이면 진영(鎮營)에서 멀리 떨어지고 바닷길을 통해 서쪽으로 서울을 바라보는 곳에 이 진(鎭)을 설치했겠는가." 통제사 오중주가 직임이 바뀐 뒤에도 능히 공의 유풍(遺風)을 일으키고 공의 처음 뜻을 밝히는 것은 그야말로 반드시 후임 통제사로 하여금 거듭이 자리를 닦게 하려는 것이요, 지금 이 진의 백성들에게도 길이 우러러 사모할 바가 있게 하려는 것이니, 그 또한 가상하다. 승정기원후 95년 임인년(정종 2, 1722년) 8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 5대손 봉상(鳳祥)이 외람되이 참여하고 통제사가 감독하여 이 역사(役事)를 마쳤다. 1) 1) 조동원, 「한국금석문대계, 1, 원광대학교출판국,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