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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동북만주로 망명하시어 유동렬 최동오 동지와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친일군벌인 장작림에 대항하다가 급기야는 풍옥상 장군의 서북국민부대의 장성 참모로서 항일전선에 동부서주하시다가 장개석 군대와 통합으로 국민정규군 소장참모로서 항일전선에서 사투를 하셨다. 또 김구 김규식 동지와 더불어 한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및 외교위원으로서 항일하셨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개석 총통의 장군막료로서 또는 중경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서 또는 귀주성 식봉현의 유격대 학교 교수로서 항일일선에 투신하셨고 장개석 총통에 한국독립의 중요성을 수차 역설하셨다. 이후 소위 태평양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육군중장을 승진되어 일본북지부 방면 최고사령관 및 기장병들의 무장해제를 담당하셨고 연합군 동경주둔의 중국사령막료서 임명되었으나 팔로공산군의 내란으로 진주가 중지되자 중국군에 더 있을 의의가 없다고 하야하시어 재중 한국인 학병의 규합 및 중국 한국인 2세 지도를 담당하시다가 1947년 8월에 귀국하시어 동 음9월 14일 51세를 일기로 불의의 급사를 당하셨으니 오호라! 중생은 이 비보에 앙천복지하여 통곡할뿐이었읍니다. 장군은 궁중야화에 정통하셨고 묵화등과 각인재능이 비상하였으며 배는 청주한씨 문이(1897년 음 5월 7일 생 1966년 음 4월 24일 졸)이며 슬하에 남 중희와 녀 선희) 남매가 있으며 장손 재현 재윤 재건 손녀 재진 봉화 재익 창훈 등 6남 1녀가 있다. 기후 1968년 3월 1일 정부에서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고 다시 1977년 12월 20일 훈격을 높여 건국군민장을 추서받았다. (장의는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