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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공세 당시의 영천 상황
북한군은 8월 공세의 작전목표였던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지 못한채로 9월에 들어서기 전에 작전 한계점에 이르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다가온 승리와 한반도 공산화라는 달콤한 유혹에 젖어서, 경인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최후의 예비전력까지 모두 차출하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부산과 대구 점령을 위한 새로운 대공세를 계획하여 8월 21~30일을 새로운 작전준비기간으로 정하여 9월에 다시금 공세행동을 준비하였다. 큰 틀에서 보면 북한은 낙동강 일대에 집약되어 있었던 국군과 미군의 병력을 두개의 공격집단으로 나누어 타격함으로써 포위/섬멸하고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하에 서부의 북한군 1군단이 8월 31일에 공세행동을 개시하여 대구-부산간을 차단하고 북한군 2군단은 9월 2일에 후속하여 공격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북한군 2군단은 왜관-포항선 일대에서 2군단 3공격 집단으로 편성된 제1사단, 3사단, 13사단으로 하여금 왜관-다부동 축선을 방어하던 미 1기병사단과 국군1사단을 돌파하여 대구를 점령하고, 4공격집단으로 편성된 제8사단, 15사단이 신영-영천을 방어하던 국군 제6사단, 5사단은 안강-포항의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을 돌파한뒤 울산-부산 방면으로 진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9월 공세가 시작되자 북한군 15사단은 9월 2일 야간에 일제히 영천을 향해 공격 다음날 한국군 8사단 16연대의 우일선이 붕괴되면서 한국군 8사단은 영천 북방 기룡산 일대로 철수 좌일선에 8사단 21연대 중알일선에 8사단 16연대와 7사단 3연대 1대대, 우일선에 전날 배속된 7사단 5연대를 배치하고 육본 며영으로 신녕에서 작전중이던 7사단 8연대를 영천의 8사단으로 배속시키고, 5일에는 7사단 공병대 200명을 추가로 투입 전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북한군 15사단은 북한군 2군단장 무정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사단장의 명령으로 9월 5일 01:00에 폭우속에서 기습공격을 실시 6일 03:00시에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한국군 7사단 5연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8사단 공병대대가 영천읍내에 투입 영천을 1차 탈환했으나, 7일 야간에 다시 피탈 당했다.
북한군 15사단은 2개연대를 동원 경주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하던중 8일 2군단 예비로 차출된 한국군 6사단 19연대의 공격으로 영천을 재탈환했다. 9일에는 동해안의 포항지구에 투입됐던 8사단 10연대를 원대복귀시켜 임포동 지역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고, 다부동 방면의 한국군 1사단 11연대도 지원 병력으로 배속이 되었다. 상황이 호전되자 좌측의 8사단 21연대가 영천 돌파구를 방어하는 가운데 한국군 8사단 10연대, 16연대, 21연대와 7사단 3연대, 5연대, 8연대 그리고 6사단 19연대등 총 7연대가 반격을 개시 10일에는 영천일대의 북한군을 소탕하고 12일 최초 방어선을 회복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은 괘멸적 손실을 입고 전열에서 이탈했으며 북한군 지휘부의 평가에 의하면 영천의 상실로 전체 작전의 패색이 짙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