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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가평의 일과 인맥 (다) 을사조약과 순국 당시 국내정세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대한제국정부는 중립을 선언했 지만 일본은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고, 그해 8월에는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재무·외 교 부문에 고문정치를 시작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한국에서의 정 치 · 경 제 ·군사상의 우월권을 인정받은 상태에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 결했다. 조약이 체결되자 원임의정 대신(原任議政大많) 조병 세(趙秉世)와 함께 조약에 찬동 한 5적을 성토하고 조약의 파기를 주장했으나 조병세의 체포로 실패했다 이어 2차 상소를 전개했으나 나라의 운이 이미 디-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해 국민을 각성시킬 목적으 로 그해 11월 13일 오전 6시경 2,000만 동포와 고종 및 주한 외국사절에게 보내는 3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의 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조병 세 · 김봉학(金奉學) .홍만식(洪萬 植) .이상철(李相喆) 등이 그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제 에 항거했다. 저서 로는 〈민충정공유고 閔忠正公遺鎬> . <해천추범 海天秋빼> . <사구속초 使歐績草> . <천 일책 千一策〉 등이 있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대신(大도뼈國몇싸大夫議政大l펀)에 추증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I티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고종 때의 문신, 순국열사 본관은 여흥, 자는 문약, 호는 계정, 단기 4211년 고종 15년 문과에 급제 미국공사 외부 학부 탁지부 대신을 역임하였고, 왕의 시종무관무관으로 있을 때, 의정 대신 조벙세 선생과 함께 을사보호조약을 강력히 반대하며 상소하였으나 뜻을 못 이루고, 통분 끝에 할복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정공 서울 견지동에 유적비가 세워졌고, 와 룡동에 동상이 세워 졌다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이 수여 되였다 (2)민영환 선생의 유고 O 국민에게 남긴 유서 아! 우리나라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다다랐구나 생존경쟁이 심한 이 세상에, 우리민족의 운명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맹세하는 사람은 살아날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 이다. 나 영 환은 한 죽음으로써 황은을 갚고,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려 한다 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황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 형제여 ! 천만 배나 분려(첼臨1)를 더하여 지기(志氣)를 굳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