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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의 지리적 중요성
경상북도에 위치한 영천은 한국전쟁 당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지형적 특징으로 대구에서 35Km, 경주에서 28Km 거리에 위치하며, 인구 25,000명을 가진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북한군이 영천을 점령한다면, 대구와 경주 방면으로 융통성있는 공격을 할 수 있으며, 한국군 제1군단과 2군단을 분리시키고 한국군 유일의 동서보급로를 차단하게 됩니다. 또한 한국군 2군단의 퇴로가 차단되며, 대구 방면의 미 제1기병사단에게도 큰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북한군이 경주방면으로 진출하여 북한군 제12사단과 제15사단이 합세하여 부산방면으로 진출한다면 한국군에게는 절대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전쟁의 승부처로 떠오른 것입니다. 영천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이 돌파되느냐 사수하느냐를 가름지을만큼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였으며 특히 9월 5일에서 6일 대구-경주가 위협받은 무렵 영천이 돌파되어 그 위히가 더욱 가중되어졌다.
북한군 2군단은 5개연대를 동원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로 진출하려 했지만, 한국군은 이곳에 8사단과 신편 7사단의 3개연대는 물론 제1사단과 6사단의 1개연대도 투입 방어 조치를 취함으로써 방어선을 지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전투는 낙동강선에서 최초로 북한군을 패주시킴으로써 한국전쟁의 전환점을 마련한 전투였다. 1950년 12월 4일 김일성은 별오리 회의에서 한국전쟁의 패인을 분석하면서 "우리는 영천을 점령했을때 승리할 수 있었고, 영천을 상실함으로써 패배하였다"고 자기 비판을 했다고 합니다. 영천전투의 승리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영천전투전 미 합참에서는 부산까지 함락될 경우를 가정해서 '신한국 계획'(NEW KOREA)을 수립하고 승인을 했는데, 한국군과 정부 인사 및 민간인 62만명을 태평양의 서사모아 제도에 배치시키는 계획이었는데 한국정부와 국민의 반발을 의식하여 비밀로 하고 있었습니다. 9월 7일 영천이 함락되면서 위험이 최고조에 달했을때 미8군 사령관이었던 워커중장이 한국군 정일권 총장에게 이 사실을 귀뜸해 주었는데 대책을 묻는 정총장의 질문에 워커중장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영천만 찾는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포항, 안강, 기계, 다부동, 왜관, 창녕, 마산등 영천만 무사하다면 다 무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