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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권이 일본군에게 빼앗기자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몸바친 선산갑오농민의병과 선산을미의병 피어린 투쟁은 한국의병사의 시작입니다. 이곳에 자랑스러운 그 역사를 가슴에 새기면서 후손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가르치는 산 교육장으로 갑오전쟁 선산창의비와 선산을미의병효시지비를 세웁니다. 갑오전쟁선산창의115주년관 선산을미의병114주년을 맞는 2009년 새봄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문학박사 임지룡 근찬
선산읍 노인회 : 김시진, 김상구, 김재수, 김종철, 김동태, 강용배, 권태만, 문경진, 손용섭, 신장식, 안무술, 윤맹규, 육태옥, 이정열, 장재하, 조동목 세우다.
◎ 일본군이 선산 성곽까지 쫒아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1895년 9월 초 선산을미의병은 야밤중에 산간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이날밤 의병장 한교리는 피눈물을 토하듯이 글을 지었다. "성모께서 변을 만남은 참으로 천고에 없는 삼강오상의 대변이고 백성으로서는 모두 통훈하는 바이다." (심재완)
(※ 학봉종택 김홍락 종손은 영남을미사변 의병장 한교리의 활동자금을 지원하면서 일본군에 쫓기기도 하였다. 미국 화성돈 공사관 신태무)
◎ 의병장 한교리 생포작전이 실패하자 일본군은 그의 부인을 선산읍성에 칠일간 인질로 잡았다. 이 유인 작전에 한교리가 걸려들지 않자 일본군은 그에게 전할 편지를 주며 부인을 풀어주었다. 그 뒤 부인을 가라골 피신지에서 만난 한교리는 훈계하면서 편지를 읽지않고 짚불에 태워버렸다. (황신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