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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 김언교 근화는 이중연 복희는 한용식 미희는 박노숙에게 출가 정희는 미성이며 손은 현익이다. 공은 영오한 자질과 강직한 기개로서 진농 재학 중 3.1독립운동에 앞장 섰다가 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일제 항거의 일념으로 1919년 만주로 탈출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 후 이청천 장군 휘하에서 역사에 빛나는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노두 만명월 왈이저우우두량창 싸움에서 분전하였고 소련의 내란 진압에 협조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을 원조하며 한인자치를 허용한다는 협정을 믿고 소련에서 군사활동을 하였으며 그곳에서 이청천 장군이 설립한 고려혁명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연대 대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소련 공산당에 의해 민족주의자란 죄명으로 강제로 무장해제를 당하자 소 군과 충돌 흑하사변이라는 큰 전투가 발생 수 많은 독립군 병사가 희생되였고 남은 독립군과 같이 6개월간 포로 생활도 하였다. 그 후 만주로 돌아온 후 국부 군정치학교 교관을 거쳐 신간회 일로 밀입국하여 박춘성 외 3명과 같이 진주 금융조합 예금을 군자금으로 탈취한 사건으로 왜경에 피체 18개월간 복역하고 출옥 후 일제의 회유에도 항거 오히려 일본의 녹을 먹지 않는다는 무직회를 조직하여 애국청년들을 이끌었으며 일제말기에는 무서운 강압과 감시 속에서도 항일 고려구국회를 조직 변상태 이주현 구여순 등과 지하운동에 열화 같은 정집을 불태워왔다. 마침내 광복이 되자 서부경남 치안군사부장 광복군 국내 지대 헌무부장 광복청년회 중앙본부 정훈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군창설 초창기 국방 경비대에 투신 육군사관학교 3기 특반군기학교 참모학교를 거처 육군 제5군단 1021사단장을 역임하다가 예편 재향군인회 상무부회장을 거치는동안 공의 족적은 험난했으나 많은 훈장과 독립유공표창으로 그 거룩한 뜻은 청사에 빛날 것이다. 공은 침착한 지략과 겸손한 마음으로 군사를 아꼈으므로 사람의 사력을 얻을 수 있었고 독립군에서 국군에 이르기까지 규율과 상벌과 준법에 엄정한 처사로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피에 얼룩진 군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