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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 곽종석의 문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에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유림계에서는 거국적인 3.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학자들이 불참하게 된 것을 통분하고 한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요지의 장서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1919년 경남 거창의 유생 곽종석, 경북 성주의 장석영, 충남 홍성의 김복한 등이 주축이 되어 파리장서를 작성, 김창숙이 이를 소지하고 상하이로 갔다. 이때 그는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김복한·김창숙 등과 함께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이 파리장서는 다시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송달되었고, 국내외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 뒤 그는 만주 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려던 제2차 유림단사건에도 가담하였다. 2차유림단 사건은 김창숙이 1925년 3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 동지 송영호·김화식·이봉로 등과 만주·내몽고 일대에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운동세력 양성을 위해 군자금 모금 실행방안을 강구하려던 것이었다. 1926년 1월 상순 김창숙은 대구에 와서 김화식과 송영호를 각지로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나 모금 총액이 12,400원에 불과해 예정액 200,000원에 크게 미달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제2차 계획을 세워 4월 11일 상해에 도착, 의열단의 유우근 등과 상의하여 의열단원을 동원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영남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사실을 탐지한 일경이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 약 600여 명에 달하는 많은 유림을 체포·구금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2차 유림단 사건이다. 이태식은 파리장서사건에 이어 이러한 제2차 유림단사건에도 관계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