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page


206page

여순사건 당시 광양의 상황 광양은 일제강점기에 항일 농민.노동자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해방 직후 '배항축하광양군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시대적 소명에 충실하였다. 제주 출동을 거부하며 봉기한 14연대 군인들이 1948년 10월 20일 순천으로 진군하자 이들을 막기위해 광양 경찰이 출동했다. 순천 생목동에서 기습 공격을 받고 후퇴한 광양 경찰은 오후에 경찰서에 잡혀있던 좌익혐의자 20여명을 덕례리 반송재에서 총살하였다. 여순사건 첫 민간인 집단학살이다. 봉기군은 광양에 진출하였으나 군인과 경찰의 공세에 백운산으로 쫓겼다. 봉기군은 좌익세력과 함께 백운산과 지리산을 근거지 삼아 빨치산 활동을 하며 관공서와 군경을 여러 차례 기습하였고, 군경은 6.25전쟁을 거쳐 1955년 초까지 토벌작전을 펼쳤다. 낮에는 군경이, 밤에는 빨치산이 서로 다른 요구를 하며 주민들은 오랜 기간 생존을 위한 선택을 강요받았다. 이제 지역사회는 백운산 골짜기에서 스러진 넋들을 위로하고, 공동체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