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page


202page

최세윤 의병장은 흥해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특히 병서를 즐겨 읽어 정통하였고,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절의를 숭상하였으며, 흥해군의 형방서기를 역임하였다. 1894년 동학운동에 참여하여 소모장으로 부하 3백 명을 영솔하고 맹렬히 활약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인으로부터 시해를 당하자, 통분함을 금치 못하여 거의토적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규합을 적극 주선하여 의병 3∼4백 명을 인솔하고 안동의병장 김도화 의진에 입진하여 아장에 임명되었다. 적을 공격하여 군세를 크게 떨쳤으나 무기가 불충분하고 훈련이 부족하여 악전고투를 면할 수 없었다. 또한 적군이 대거 증원됨에 항전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자, 의병장 김도화와 상의하고 재기할 것을 기약하면서 일단 의진을 해산시켰다. 그후 향리로 돌아와 고향인 계림에서 2세 교육과 인재양성에 진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재차 거의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동엄 정환직이 황제의 밀지를 받들어 아들 정용기로 하여금 고향 영천을 중심으로 거의하도록 하였다. 이에 정용기가 이한구를 파견하여 거의할 것을 요청하므로 즉석에서 찬성하고 영천으로 정용기를 방문하였다. 때마침 정환직이 내려와 있으므로 4인이 함께 거의방략을 논의하고 같이 거의할 날짜 등을 약속하고 돌아가 준비를 서둘렀다. 이로써 산남의진이 편성되었으나, 산남의진이 거의할 때 마침 신병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신음하게 되어 입진하지 못하여 통한을 달래고 있었는데 정용기 등 다수의 의병이 입암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참전하고자 달려갔으나, 다행스럽게도 정환직이 그 잔병을 수습하고 영솔지휘한다 하므로 신병 치료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다시 정환직이 순국하였다는 비보를 접하고, 병석을 박차고 일어나 "나라일이 위급한 이때에 내 어찌 일신을 아끼고 종사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보겠는가. 또 어찌 친구와의 맹약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오직 나도 죽어서 보답함이 마땅하니 왜적과 싸워 죽겠다." 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의진을 찾아갔다. 1908년 2월 부장 이세기·정순기 등은 주장 잃은 의진을 수습하여 보현산 속에 주둔하고 있다가 최세윤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의병장이 된 그는 전군을 영솔하여 흥해·청하·청송·영해·영천·의성 등지에서 활동하며 적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에 모여든 의병이 5백여 명에 달하였고 군세가 크게 떨쳐 승승장구하였으나, 의성에서 적과 접전하여 크게 패배하였다. 적은 의병대토벌전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때이었으므로 전국의진이 거의 패몰하고 고립되어 형세가 자못 불리하게 되어갔다. 이에 부득이 피신하여 재기할 준비를 하였다. 적은 최세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액의 현상금을 걸고 수사망을 펼쳤다. 결국 장발면 내남면 용동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청하 헌병대로 압송되던 중 다음과 같은 시 한 귀를 읊어 그의 충절을 도모하였다. 나라가 깨어지고 집이 망한지 벌써 몇 년인가. 한 가닥 실오라기 같으니 푸른 하늘이 부끄럽다. 장부가 이에 이르러서야 돌아갈 바를 알겠구나 은나라는 백이·숙제가 있으며 주나라는 연이 있구나. 그후 적에게 욕을 당하느니 내손으로 목숨을 끊고자 하여 물속에 몸을 던졌으나 일헌병과 주구 김영준이 급히 뛰어들어 구출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악에 바친 일헌병이 구타하려고 하므로 "내 나라를 내가 찾으려 하는 것이 무슨 죄이냐. 비록 죄가 된다 하여도, 나를 죽일지언정 내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하리라." 하고 호통을 치니 잔학무도한 일헌병조차 그 대의에 눌려 차마 손을 대지는 못하였다. 1911년 11월 15일 대구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10년의 징역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2월 12일 대구공소원 형사부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경성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수감된 뒤 그곳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일체 거절하고 부인이 넣어 주는 사식만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권토중래의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그 사식마저 거절하고 단식 항쟁하다가 1916년 8월 9일 옥중순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