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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도 성은 지탱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 당지인들의 공통된 통한 어린 외침이었음을 역사는 전한다. 전라감사 이정암이 위의 계사연말 보고에서 공의 진주성에서의 최후를 설명한 후 오호라 황진이 죽지 않았던들 진양도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외다. 공의 그 우뚝솟은 충의애국의 절은 이를 고인에 견주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외다라고 끝맺은 것도 또는 효정 3년에 공의 행장을 지은 당시의 우의정 조익이 그 글에서 진주성 함락 당시 그 곳을 빠져 나온 사람들이 모두다 황공약재언들 성필부지함의라고 말하였다는 사실을 전한 후, 그러나 비록 공은 죽고 성도 무너졌으되 적의 기세 또한 여기에서 크게 꺾이어 결국 그들도 호남 진격의 야욕을 버리게 되었으니 폐차호남 재득보전의 공은 모두 공에게 있도다 라고 결론한 것도 다 그와 같은 사실에 근거 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공의 그호남을 지키고 조국 재훙을 가져오게 한 공을 논함에 있어 이현전의 공적을 빠뜨릴 수가 없다. 또 공을 도와 이곳에서 공과 함께 의롭게 싸운 수많은 유명무명 인사들의 공적도 아울러 기리지 않을 수가 없다, 호남절의록만 보더라도 앞에서 거명되지 않은 최호, 양응원, 박흥남, 박기수, 노흥, 권래, 이보, 김덕명, 노안등의 이름이 보인다. 불행히도 진주에는 사우가 모셔지고 정충단비가 세워 진지 이미 수백년이로되 그 수백년 동안 이곳 이현에는 표목 하나 없었으며 비록 그간 구비의 칭송이 있어다고는 하나 세태 풍조의 급변으로 이네 그 구비마저 사라지고 있으니 뒤늦게 나마 이 대첩비를 이곳에 세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끝으로 다년간 이 일을 주간해 온 추진회 여러분의 노고가 컸음을 첨기한다.
단기 4332(1999)년 5월 일
전 국사편찬위원회 전북대학교명예교수 원광대학교 교수 송준호 근찬 성균관대학교전유학동양학부교수 문학박사 송하경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