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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4.~6. 수원, 평택 등의 일본군 지원 병력과 경찰이 출동하여 만세시위 주동자 및 참여자 색출.검거.진압, 양성면 및 원곡면의 만세운동 참여자 300여명 체포, 조선총독부에서 체포된 양성.원곡면 만세운동 참여자를 내란죄로 적용하여 고등법원에 공소
1920.3.22 고등법원 내란죄 불인정,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 지정 127명 기소(보안법 위반 등)
1920.8.10 경성지방법원 제일형사부에서 만세운동 참여자 127인에 대한 1심 재판
1921.1.22 경성복심법원 형사부에서 만세운동 참여자 125인에 대한 복심 재판, 징역 12명 2명, 징역 10년 4명, 징역 7년 15명, 징역 5년 4명, 징역 3년 28명, 징역 2년 6월 30명, 징역 2년 33명, 징역 1년 3월 9명
1921.2.3 경성복심법원 형사부에서 양성주재소, 양성우편소, 일본인 외리여수.융수지의 건물 파괴 등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사송사건 판결, 1,279엔 5전 연대채무배상 8명, 3,046엔 연대채무배상 15명, 1,057엔 25전 연대채무배상 5명, 819엔 38전 연대채무배상 2명, 태형 40명, 현장 순국 3명, 안성경찰서 순국 5명, 서대문형무소 순국 9명, 부상 후 순국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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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의 독립운동 이야기
'양성.원곡의 3.1운동'
1919.3.11 양성면 양성공립보통학교(현 양성초등학교) 학생주도 첫 만세시위
1919.3.28 원곡면 지문리.내가천리.외가천리.월곡리.죽백리.칠곡리 주민들의 만세시위
1919.3.28~3.31 원곡면 각 마을 주민들의 만세시위
1919.4.1 원곡면 각 마을 주민들의 만세시위, 원곡면사무소에 집결한 원곡면 주민들 1,000여명의 만세시위, 오후 8시경 원곡면 1,000여명의 주민들이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양성면으로 행진, 만세고개에서 이유석, 이덕순, 이근수, 이희룡, 최은식, 홍찬섭 등이 안성의 독립투쟁격문 연설, 양성면 덕봉리, 도곡리, 산정리, 추곡리, 석화리, 구장리, 명목리 등 각 마을주민들의 만세시위, 오후 9시경 양성면 동항리에 집결한 양성면 주민들 1,000여명의 만세시위 양성면.원곡면 주민들이 연합하여 2,000여명의 군중으로 대규모 만세시위 양성면사무소, 양성주재소, 양성우편소, 일본인 집과 상점, 전신주 등을 파괴하고 일장기, 집기, 서류 등을 소훼
1919.4.2 양성면 동항리 일대에서 새벽까지 만세시위, 원곡면 주민들 1,000여명이 원곡면으로 돌아가 재차 만세시위 후 원곡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일장기, 집기, 서류 등을 소훼, 원곡면 주민들이 평택의 경부선 철도 파괴를 모의하였으나 일본군 출동 소식으로 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