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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오백년 사직이 육침된 후 근화세계의 양춘일맥이 서곡이 합주를 되찾을 때까지 인인지사가 수기치인을 지향함에 있어 자타의 공인을 받은 분이 화암 정현섭 선생이다. 선생은 일찌기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시예와 한묵의 가업을 계승하던 중 신구의 이질적인 사상과 문물이 허다한 갈등과 모순을 드러내면서 이의 규합을 시도할 무렵 망국의 사의를 딛고 궐기한 삼일독립운동을 계기로 지사 호객들이 국내외에 걸쳐 각자의 책무와 소임을 수행하던 때 결연히 구국의 웅지를 안고 조국광복의 일익을 담당코자 양기탁 등과 협조하여 조직한 독판부의 국내 조직망을 포진으로 일본 관헌에 탐지되어 1921년 중국으로 망명, 중국 무정부주의자들과 제휴하여 대일영 총파업을 지휘하고 이화영, 백정기, 이을규, 유자영 등과 같이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여 기관지 '정의공보'를 간행했으며, 김좌진 장군이 피살된 후 북만에 잠입 활약 중 김종진, 이준근, 김야운 동지를 잃고 일군의 대수색 작전에 직면하여 간 일발의 위기를 벗어나 상해로 철수, 남화한인연맹을 조직하고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한 후 동 연맹 행동대인 흑색공포단을 편성하여 일본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을 지휘, 1933년 주중일본공사 유길명을 암살하려다가 백정기(무기형 옥사), 이강훈, 원심참(장기형)이 체포된 후 계속 일제 주구 숙청을 결행하다가 1935년 엄형순(사형), 이규호(장기형)가 체포되자 백범 김구와 협의한 후 서간단을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강, 이하유, 박기성, 나월환 등과 한중합동유격대와 전시공작대를 조직하여 일군 수송로 파괴, 연합군 포로구출, 한인 학도병 탈출공작을 전개하여 지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8.15 해방 후에는 상해 거류민단장과 인성학교 이사장으로서 교포의 구호와 교육에 주력하고 중국 원로 오취휘, 이석중, 주세, 양가락, 한인 동지 이하유 등과 조선학전관 신채호 학사를 설립하여 한국학 연구의 길을 트고 교포들의 자주와 승문사상 계몽에 주력하였다. 7954년 귀국하여 1956년민주사회당을 발기 1961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에 취임하였다. 5.16 군사쿠데타로 옥고를 겪었고, 1973년 양일등, 김홍일, 윤제술, 장준하 등과 민주통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과 상임고문으로서 반독재 민주회복 투쟁을 벌이는 등 여생의 일각까지 청렴고고한 지조를 지켜오시다가 1987년 1월 21일 홀연히 급서하시니 향년 86세이다. 선생의 휘는 현섭, 자는 윤옥, 호는 화암이며, 본관은 동래이다. 1896년 9월 16일 휘 환전공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