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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김공 용해는 경주인이니 부는 태련이요 모는 김갑만으로 1895년 7월 26일 대구 남산동 537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17세에 대구공립보통학교를 나와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기미3.1독립운동을 맞았다. 대구지방의 궐기를 책임진 부친을 도와서 1919년 2월 25일부터 밤을 새워가며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계성학생과 성경학원생을 비롯 대구고보와 신명여고보학생을 동원 3월 8일 오후 2시를 기하여 서문시장에 집결한 군중과 더불어 시위를 주도하는 부친의 신변을 살피면서 그 뒤를 따랐다. 시위행렬이 대구시가를 누비며 동성로3가에 이르자 일본군경들의 철추에 맞아 부친이 쓰러지자 성난 사자처럼 단신으로 뛰어들어 일대혈투를 벌인 끝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아 사경에 이르러서야 내쳐져서 3월 12일 행년 24로로 생을 마쳐 대구기독청년회에서 장례를 지첬다. 부친은 옥중에서 그를장송하고 2년 6개월만에 출옥하자 아들의 무덤을 찾아 (너의 죽음은 장하되 처절했던 최후를 못잊게 하네)하며 징역노임으로 받은 3원 50전으로(三一義擧 義血淋濟乃爺若賃立石朝陽, 3.1의거 의혈임제내야약임입석조양)이란 비를 세웠다. 광복후 부친의 유해와 함께 선영묘지로 이장하고 1968년 3.1절에 대통령표창이 내려 1986년 가을에 국비영달로 이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