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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仁植)은 김인식은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1928년 3월, 여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4월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29년 11월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930년 3월, 퇴학처분을 받았다. 동년 4월, 보통학교의 교사를 하다가 동년 12월 사직하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0년 3월부터 장평완(張平完)·최준문(崔俊文)의 지도를 받아 사회과학 연구에 관한 팜플렛, 잡지 등을 읽고 연구한 결과 사회주의를 확신하게 되었다. 3월 하순, 고려공산당원 김영균(金永均)의 권유로 여수보통학교 출신으로 조직된 독서회(讀書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독서회는 1929년 8월 상순 여수에서 여도현(呂道鉉)·김용운(金龍云)·김양식(金良植)·김용환(金龍煥)·여운종(呂運鍾)·장평완 등이 유산자와 무산자의 모순과 불평등한 사회제도를 타파하기 위해 조직한 것으로, 이를 통해 회원 스스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일반 대중에게 신사상을 선전하여 계급의식을 함양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도현·김용환·여운종 등이 1930년 2월 1~2일에 걸쳐 일제에 검거되자 김영균이 독서회를 인계하여 지도하였다. 1930년 6월경 김영균이 독서회를 박채영(朴采永)에게 인계하고 경성으로 돌아갔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장평완은 1930년 8월 상순, 여수읍 봉산리 의암산(義岩山)에서 그를 포함하여 오우홍(吳宇鴻)·박희봉(朴熙奉, 朴炳林)·이상도(李相道)·김용운·김양식 등과 협의하여 독서회와 동일 강령·목적을 갖는 여수사회과학연구회(麗水社會科學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의암산 등 여러 곳에서 수회에 걸쳐 모임을 갖고 공산주의 이론연구 및 그 조직 확대에 협의하였다. 또한 동지 의식을 앙양하기 위해 1930년 11월 7일 러시아 혁명기념일 당일에는 장평완의 집에서 기념식을 열기도 하였다. 독서회는 1930년 12월, 자연히 해체되었다. 1931년,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복역하다가 출옥한 이창수(李昌洙)의 지도를 받았고, 1932년 3월경 정충조(鄭忠朝)와 만나면서 사회과학연구 활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32년 7월에 국제 적색노동조합의 테제에 의하여 여수읍 의암산에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였다. 회원들은 노동복을 입고서 노동시장에 나가서 주의를 선전하며 동지를 규합하고, 여수 고무공장과 여항(麗港) 운수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을 주도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10월경에 장평완이 이창수와의 감정문제로 탈퇴하자, 이창수 등 회원들과 함께 표면상 결사를 해체하고 각자 지하운동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1933년 7월부터 일제의 감시가 심해졌고, 이후 7개월 동안 전라남도 경찰부 고등과와 여수경찰서의 합동작전에 의해 조선공산당재건 전남연맹과 여수적색노동조합 관련자 80여 명이 검거되었다. 김인식을 포함한 여수적색노동조합에 관련한 20여 명은 취조를 마치고, 1934년 1월 29일에 여운종·박채영·오우홍 등과 함께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되었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첫 공판은 1936년 5월 20일경에 열렸으며, 1936년 6월 2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미결구류 300일 통산)을 받고 출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