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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9월30일 화요일 2 (제225호) 기 획 호남의 유학자 신 암 변시연 선생은 만 곡사의 주벽으로 모 셨던 묵헌 봉여해 선 생에대해‘칼차고입 궐하니 단종의 충신 이요 사육신의 짝이 로다 묵헌 선생 만곡 사에 취금헌 선생 위 패 한가운데 모셨으 니백세공론뉘아니복종하리우러를수록더욱높아라’라는시조 를지어칭송했다. 이처럼사육신에버금가는절의를지킨묵헌공을모신만곡사는 1974년취금헌박팽년선생을추배하면서절의의상징이되었다.그 리고지난9월2일성균관유도회장성군지부(회장심대섭)가주최 하고장성군과하음봉씨종친회(회장봉대천)후원으로‘만곡사(萬 谷祠)의가치와보존·활용방안모색’의주제로전북대학교역사콘 텐츠학과변주승교수를초청학술강연회를가져강연을한변주승 교수의자료를인용소개해본다. 만곡사는 장성군 삼서면 보생리이문마을(태산로 273-33)에 소 재하고,전라남도문화재자료98호(1984년)로지정된사우이다. 조선정조15년(1791)송계봉유례(1354-14)와풍애봉즙1578-1 439), 묵헌 봉여해(1419-1456)등을 추모하기 위해 단을 설치했던 곳이다. 그 뒤 정조17년(1793) 신당인 만곡사를 세워 묵헌 봉여해 만 모시다가 철종 13년(1862)에 봉유례,봉즙,봉단의를 추가로 모 시었으나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다 가1903년에다시 세웠다.그리고 1964년 지역 유림의 발의로 중건 하였다.이후 1974년 별묘를 세워 백강 봉문,송계 봉유례,풍애 봉 즙 선생을 이안하고, 만곡사에는 취금헌 박팽년 선생을 추배하여 기존의묵헌봉유해,송탄봉단의등3위를모시게되었다. 건물로는 만곡사, 별묘, 강당인 숭절당, 고직사, 내삼문, 외삼문 으로구성되었으며,신당인만곡사는앞면3칸,옆면2칸규로로맞 배지붕이고,강당인 숭절당은 앞면 4칸 옆면 2칸이 팔작지붕 와가 이다. △취금헌박팽년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 호는 취 금헌.아버지는판서를지낸중림이 고,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 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 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학 사가 되었다.1438년 삼각산 진관사 에서사가독서를했고,1447년문과 중시에급제했다.문종이왕위에오 른지2년만에죽으면서,그를비롯 하여 황보인·김종서·성삼문 등에 게 어린 단종의 보필을 당부했다.1 453년(단종 1) 우승지·부제학을 거쳐 1454년좌승지·형조참판을지냈다. 1455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 신권의 지나친 강대화와 왕권약화 를 우려한 왕실세력 중 수양대군이 김 종서·황보인·정분 등을 축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세조에게 올리는 문서에는 븮신븯(臣)이라는 글자 대신븮거븯라는글자를쓰고녹봉에도일 체손을대지않았다고한다.1456년(세 조2)다시형조참판에기용되었다. 세조의 집권과 즉위 과정에서 집현 전출신의관료가요직에많이등용되 었으나,의정부서사제도대신육조직 계제를 실시하는 등 왕의 전제권을 확립하려는 조치에 대해 집현 전 출신의 유신들은 즉각 반발했다.세조의 전제권 강화와 독주에 불만을 품은 일부 유신들은 마침내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 시켜 관료지배체제를 구현하려 했다. 당시 형조참판으로 있던 박 팽년은 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 등 대부분 전직·현직 집현전 유신들과함께세조를제거할계획을세웠다. 1456년6월에창덕궁에서상왕인단종앞에서명의사신을접대 하는기회를이용하여왕의호위를맡은성승·유응부등이세조와 그추종자들을없애기로했다.그러나그날아침갑자기세조가이 들의 시위를 취소시켰으므로 거사를 후일로 연기했다. 이에 모의 에 참여했던 김질(金 獰 ) 등이 불안을 느끼고 이를 밀고해 성삼문 등 주모자들과 같이 체포되었다.그의 재능을 아낀 세조가 사람을 보내어회유하려했으나,세조를븮나으리븯라고부르면서끝내뜻을 굽히지않다가심한고문을당하고옥사했다.얼마후아버지중림, 동생대년,아들헌·순·분등3대가처형되었으며,어머니·처·제수 등도대역부도의가족으로노비가되었다. 1691년(숙종17)에신원되어관작이회복되었으며,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 에대한충신들의어정배식록에올랐다.남효온(南孝溫)이 〈추강 집秋江集〉에사육신전을적어그를비롯해단종복위를꾀하다죽 은 6명의 충절을 기렸다.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으며, 과천 민절 서원, 홍주 노운서원, 영월 창절서원, 대구 육신사 등에 제향되었 다.글씨가 븮취금헌천자문븯(醉琴軒千字文)에 남아 있으며 묘는 서 울 노량진의 사육신묘역에 있다. 시호는 충정이다. (출처 다음백과사 전) △ 묵헌 봉여해 봉여해 자는 화보, 호는 묵현이다. 하 음봉씨이다. 병조판서 봉즙의 아들이자 박팽년의 매제이다. 성삼문 · 박팽년 등 과함께박중림에게학문을배웠다.세조 2년(1456)단종 복위 추진에 가담했다가 처형되었다. 국문 자리에서 뷺봉여해가 말하기를, 븮내가 사옹원 변좌로 칼을 차 고 들어가니, 만약 막는 자가 있으면 곧 찌르겠다븯고 하였습니다.뷻라는 진술이 나온다(세조실록,세조2년6월18일),정 조 때 단종의 충신으로 인정받아 장릉배 식단의 별단에 배향되었으며, 순조 4년 (1804) 유생의 상소에 따라 벼슬을 증직 하였다(순조실록순조4년11월18일) [묵헌봉공행장] 공의 휘는 여해(汝諧), 자가 화보(和 甫)이다. 봉씨(朴氏)는 하음(河陰)에 관 적을 두니, 고려 좌복야(左僕射) 하음백 (河陰伯)휘우(佑)가시조가된다.휘천 우(天佑)에 이르러서 충숙왕(忠肅王)이 원(元)나라에 들어갈 때를 만나 충심을 다해세자를보호하였고문겸(文謙)이라는시호를하사받았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가 된다.증조는 휘 문(文)으로,판도판서(版圖判 書)이다. 조고는 휘 유례(由禮)로, 본조에 들어와서 이조 판서가 되었다. 선고는 휘 즙(祖)으로, 병조 판서이다. 선고 판서 공은 경 주 이씨(慶州李氏)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문충공(文忠公)계맹 (繼孟)의 딸이다. 영락(樂) 기해년(1419, 세종1) 8월 15일에 고양 리(高陽里)의집에서공을낳았다.공은성품이온화하고순수하며 재주가 출중하고 태어나서 어린 나이에 이미 노성한 사람과 같았 다.성공삼고(成公三顧)형제와문민(文愍)박공중림(朴公仲林) 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박공이 공의 기국(器局)이 큰일을 이 룰만한것을아껴서자신의딸을아내로맞이하게하였다.공은취 금헌(醉琴軒)박공(朴公)팽년(彭年)과 나이가 조금 차이 났으나 지기(志氣)가부합하여서로지기(知己)로인정하였다.평소에염 정하고과묵하여종일토록단정한자세로경례(經禮)를연구하였 다.묘당에서 그 명성을 듣고 천거하여 사옹원 별좌에 제수하였는 데,공은작은관직도하찮게여기지않고한결같은마음으로직분 을 수행하여 명망과 실제가 모두 드러났다.조정에서 장차 크게 기 용하려고하였는데,육신(六臣)이상왕(上王)을복위할것을도모 함에이르러일이발각되자체포되었다.취금헌의아우박기년(朴 耆年)도 정국(庭鞠)에 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뷺봉여해가 미리 계획하여스스로븮칼을차고대궐로들어가서막는자가있으면찌 르겠다븯라고말하였다.뷻라고하였다.사형을앞두고취금헌공과이 충간공(忠公)개(塏)가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뷺남자는 살아서 는 의사(義士)가 되어야 하고 죽어서는 의귀(義鬼)가 되어야 하 네.뷻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미소를 머금은 채 죽음을 맞이하였으 니,바로병자년(1456,세조2)5월 모일(某日)이었다.여러공과함 께 적몰(籍沒)을 당하고 자손은 호남(湖南)으로 유배되었다.배위 는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감찰 인 (寅), 사직 헌(燕)이고, 딸은 진효연(陳孝淵)에게 출가하였다. 손 자는시언(時彦)이다.공은태어나면서부터지성(性)이있어서부 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고, 거상(居)할 적에는 이척(易戚)을 모두 잘 갖추었으며 죽을 먹으며 여묘(墓)하기를 삼 년을 하루 같 이 하였다.탁월하게 풍(風)이 있어서, 일찍이 격앙하고 강개하여 국가를 위해 한번 죽기를 원하였다.문장의 재주를 일찍 이루어서 저술한바가매우많았으나유고와사경(四經)의석의(釋義)가모 두 화마에 삼켜졌으니.애석하다.또 공의 삼종질(三從) 병조 판서 강성군(江城君) 석주(石柱)는 총부(摠府)에서 입직하다가 광묘 (光廟세조)가 선양 받은 것을 듣고는 실성하여 통곡하였는데,취 금헌공이경회루(慶會樓)아래의청위지(淸渭池)에투신하려다 가 성충문공(成忠文公) 성삼문(成三間))의 만류로 그만둔 것을 보고는물러나븮청위지가븯(淸渭池哥)를지었으니,다음과같다. 븮깊고깊은청위지역/요동쳐도탁해지지않고물을대도흐르지 않네/이속에투신하려는사람이여/몸은죽더라도뜻은변하기어 려우리라븯그러자시기하는자가고하여아뢰기를,뷺봉석주는좌익 (佐翊)에 참여하지 않았고 또 븮청위지가븯를 지어서 육신(六臣)의 억울함을 슬퍼하였습니다뷻라고 하였다.이에 강성군이 김공 효성 (金公孝誠)과함께같은날에주륙을당하였고공의종숙봉뉴(奉 紐)도동시에절개를세워죽었으니,이일이븮장릉지븯와븮동학사초 혼기븯(東鶴寺招魂記)에실려있다.숙묘조(肅廟朝숙종조)에특별 히 강성군의 죄안을 씻어주고 아울러 훈봉(訓封)을 회복하였다. 정묘(正廟정조)신해년(1791,정조15)에 공을 장릉(단종의 능)의 제단에배향하였고,순조을축년(1805,순조5)에공에게좌승지를 추증하고또삼계(森溪)의사당에공을제향하였다. 아, 장릉과 광릉(光陵 세조)의 시대는 사적에 궐문(闕文)이 많 아서감히할말을다하지못하지만,여러공이천인(天人)과기수 (氣數)를 다투어 구족이 멸하여도 후회하지 않았던 것은 황조(皇 朝 명나라)의 방효유(方孝孺), 철현(鐵鉉) 등의 현인들과 시대는 다르나똑같이부합한다.나는매번계유년(1453,단종1)과병자년 (1456,세조의일)을읽을때면눈물을흘리지않은적이없다.무릇 죽고 사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중대한 것이지만,몸을 희생하지 않으면 인(仁)을 이룰 수 없고 생(生)을 버리지 않으면 의(義)를 취할 수 없다.그러므로 반드시 생사의 관문을 초월하여 이로써 인 의(仁義)의 옳은 도리를 구해야 한다.이러한 까닭에 정신이 여유 롭고 힘이 안정되어 사생을 조모(朝暮)와 같이 보는 자가 아니면 어찌 이처럼 천경(天經천지간의 당연 한 도리)을 지탱할 수 있겠 는가.공의 13세손 인직(仁稷)이 공의 유사(遺事)를 안고 와서 나 에게 행장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공이 하료(下僚)의 지위에 있 으면서도의(義)를견지함이더욱굳건하여육신(六臣)과같은경 지로 돌아간 것은 특히 우뚝하게 빼어나니,이는 바로 천도(天道) 에 근원하고 민이(民彛)를 따라서,의도한 바가 없이 이렇게 하는 자인 것이다.그러므로 사양하지 않고 이상과 같이 기술하고 강성 군과 공의 종숙의 일을 함께 들어서 이로써 지언(知言)의 군자에 게고하는바이다. (매산홍직필찬(撰) 본관이 하음(河陰)이며 자(字)는 성 방(聖邦)이고 호가 송탄(松灘)이다. 묵 헌 선생의 현손(玄孫)으로 참봉 곤( 껸 ) 의 아들이다. 하서(河西) 선생의 문인으 로 음직으로 전생서(典牲 署)주부에 제 수되었고,태봉산의 남쪽에 있는 계은정 (溪隱亭) 밑에 정사(精舍)를 지어 학문 을 탐독하는 장소로 활용하였으며,촌전 에 관진정(冠盡亭)을 건립하여 오가는 사대부(士大夫)들을 영접하며 학문을 담론하는등유교적이념을 생활규범으 로 삼고 지역 주민과 착한 것은 서로 권 (勸)하고 악(惡)한 것은 서료 징계하고 도우며살아가는향약에힘써향민들로부터추항을받아왔다. 임진왜란 때에는 국난 극복을 위하여 동지들과 함께 영광성을 지키다가 제봉 고경명의 창의 소식을 듣고 삼종질인 종한(淙翰), 진한(震翰)과 같이 의병(義兵)을 모아 가솔(家率)들과 함께 금산 전투에 참가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정유재란에는 영광성을 사수하다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애석하게순절(殉節)하였다. 그후 조정에서는 호조참판에 증직을 내렸고, 만곡사에 배향 되 었으며,영광군청안에순위비가세워져있다. △하음봉씨족보서(河陰奉氏族譜序)높은수레에앉아네마리 의말을몰고가며한번부르면호응하는사람이백명이나되는것 은한때저잣거리아이들이부러워할수있으나,조금있다가연기 처럼사라지고안개처럼흩어져마치봄밤에꿈을꾼듯이이미지 나가 없어진다. 그런데 저 사람의 시운(時蓮)이 불행해지면 엎어 지고 자빠져 곤경에 처하거나 또 불행하게는 자신이 죽거나 일족 이몰살되기에이른다.그러나시간이오랠수록그향기가더욱드 러나고,받은화(禍) 가치열할수록사람들의경모(景慕)가더욱간 절하다면,이 어떤 연유로 그러는 것인가?그것은 간직한 것이 인 의(仁義)이고, 심은 것이 명절(名節)이어서 그러니, 이는 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것과 사람이 귀하게 여 기는 것의 경중(輕重)이 진 정같지않기때문이다.아.븮노릉지븯(陵誌)를읽고눈물을흘리지않 으면 사람이 아니니, 이는 충신(忠臣)·의사(義士)의 시운이 크게 불행해서이다. 이때에 옛 영화를 누렸던 사람으로서 새로운 총애 와 봉록을 받은 사람이 연달아 나왔다. 그러나 봉여해(奉汝諧)는 작은 한 산반(散班)의 입장에서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 年)제공들과함께같은날죽었으니,대체로그마음은성박(성삼 문·박팽년)의마음이었지만처지는성박과비교해보면차이가난 다.근세 숭상하여 논하는 사람들은 간혹 성박보다 어려웠다고 하 니,어찌지나친찬미이겠는가.위에서 이른바 뷺받은 화가 치열할수 록경모함이간절하다.뷻라는것이여기에있도다.공에게는또한족 숙 유(紐)와 족질석주(石柱)가 있었는데,지킨본성이 공과같아서 앞뒤로죽으니,당일봉씨는온집안이인을이루었다할만하다.그 러니 오늘 봉씨의 보첩(譜牒)은 동방의 충의열전(忠義列傳)이라 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성대하도다. 공의 자손은 남쪽에 유락(流 落)했는데, 영락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족보는 유감이될듯하다.가만히헤아려보면,자손이보존한것은반드시 공이애당초생각한것이미친것은아니리라.이제공에게후손들 이 그 수가 백 명인 것도 많다 할 만하니, 다른 좋은 일이 뭐가 있겠 는가. 봉씨는고려조중엽에현저하여대대로높은벼슬에올랐다. 우리조정에들어와서는휘유례(由禮),휘즙(楫)이모두판서를지 낸 적이 있으니, 이분들이 공에게는 조부와 부친이 된다. 백부 려 (礪)도판서를역임했는데,그의딸은문종(文宗)의순빈(純嬪)이되 었으니,공의부인(夫人)은박충정(朴忠正)의누이이다.이는공이절 의를지킨 처음과끝에참조가 될만하기에 쓰지만그 외나머지는 다싣지못한다.와서글을요청한사람은공의후손인귀(仁)이다. 나는 수보(修譜)하는 사람을 볼 때면 늘 근족끼리 족보 만드는 것 을 잘한다라고 생각했는데,인귀가 족보를 만드는 일을 나는 잘한 다고 하는 바이다.또한 봉씨 절의의 가성(聲)에 감동하여 이렇게 쓴다. (노사기정진찬(撰) 사당이훼철된뒤그빈터에제를건립할적에븮만곡븯(萬谷)이라 고편액한것은 것은옛것을 보존하는 뜻이고옛것을보존함은 잊 지않음을보이는뜻이다.사당은본래봉씨(奉氏)의선조송계(松 溪)와 풍애(楓崖),묵헌(墨軒)제사를 올리던 장소이다.송계공과 풍애공은 고려의사직이망하자 새왕조의 신하가 되지않고 스스 로 의리를 지켰으며 묵헌공은 단종이 양위하자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한 이로,강상의 윤리를 바로 세워서 명교(名敎)에 공이 있었으 니,선비들이그들을잊지않고숭앙하여보답한것은마땅한일이 었다.중간에대동조령(大同朝令)으로사당을훼철하자잊지않는 실제가 드러날 곳이 없게 되었는데,자손들이 마침내 사랑의 옛터 에묘재(墓齋)를건립하니묵헌공의아들감찰공(監察公)의묘소 가근처에있기때문이었다.옛사당의편액을그대로쓰고사당을 고쳐 묘재로 만들며 편액을 문미에 걸어 존양(存養)의 뜻을 부쳤 다.다만생각건대,만곡의사당은선비들이공적으로예를행하던 곳이고이를고쳐묘재로만든것은자손들의사사로운뜻인데,이 에공사(公私)의추모가함께있을수있을것이며봉씨한집안만 이제사를올리는장소가될뿐만이아니니.아!선비들의애석해하 는뜻과자손들의책펴지못한뜻이여기에이르러또한애절하였 다고하겠다.재가낙성된뒤후손익순이장로(長老)의뜻을전하 며나에게그일을기록해줄것을부탁하였다.다만한마디깨우침 을 주는 말로 봉씨에게 고해 줄 것이 있다.사당이 있던 빈터에 재 를 건립하고 옛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은 실로 잊지 않는 한 가지 일 이지만,잊지않는것의실제로말하자면선조의덕을강마하여수 립하여서 집안에 전하는 심법을 실추시키지 않는 데에 달려 있으 니봉씨들은함께여기에힘쓰기바란다. (송사기우만찬(撰) 아! 선생께서는 세종대왕 때 훌륭한 신하이셨습니다븣. 묵헌공 께서선생의누이를아내로맞이하셨습니다.함께의리를지키시고 하나같이죽음을맞이하셨습니다.많은선비들이만곡사를세워향 불 을 올리고,같은 사당에서 나란히 제사를 받도록 하였습니다.이 야말로정성과도리가합치되는것이라하겠습니다.이에길한날짜 를 잡아서 정 성을 다하오니,영령께서는 만세토록 변함없이 부디 흠향하소서. -산암변시연,븮역호설븯권6,븮고축븯(븮산암전고븯5,498-499쪽). 아!우리 묵헌님께서는 단종께 충절을 다한 신하였습니다.정조 임금 때 사당을 세워 제사를 모시고, 송계 님과 풍애 님의 위패를 북쪽 벽에 추가로 모셨습니다.선비들의 논의가 정해져 따로 사당 을세워두분의위패를옮기기로하고,이에취금헌어른의위패를 한 사당에 모시게 되었습니다븣.인정과 의리가 제대로 합치된 것 이라하겠습니다븣. -산암변시연,븮역호설븯권6,븮고축븯(븮산암전고븯5,499쪽). 1)배향인물및만곡사관련자료의전수조사 - 븮조선왕조실록븯등 연대기 자료,문집븡서찰븡일기 등 각종 고문 서 자료 -만곡사및배향인물관련된구술조사및녹취자료 2)수집된자료의분류정리및번역출판 -수집 자료를배향인물별,시대별,주제별로 분류 정리 정리된 자료를현대어로연구번역하여출판보급 3)학술대회개최및연구지원과홍보활동의강화 -학술대회를정기적으로개최하여학계에지속해소개 -학술대회및연구지원성과의출판및SNS활용 4)만곡사관련콘텐츠구축및공간활용 -만곡사배향인물이상징하는충효정신기반콘텐츠구축군부 대,학교와연계하여만곡사를충효정신계승공간으로활용 만곡사는 하음봉씨 후손들의 사우로 이 어져왔다.그러나 1974년 지역 유림의 공의 (公儀)를 받아들여 문중에서는 기존 배향 된선조를별묘를지어이안하고취금헌박 팽년 선생을 수위(首位)로 배향하였다. 보 통의 문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에 이날 발표를 한 변 교수는 취금헌 선생을 추배함으로서 묵헌 공의 위 상이한층더올라갔다고말한다.그리고묵 헌 선생이 호남지역 인물이 아닌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되었다고도 한다. 이는 박씨종중의 종중신문이 보도 하고지역신문에서게재되어적극적인홍보가이루어짐으로써전 국의 박씨후손들이 하음봉씨를 알게되고 또묵헌선생의절의 정 신을 접할수있게된다는 것으로하음봉씨문중의 종원들은 선구 자적 혜안을 가졌다며 극찬했다.한편 이날 학술대회에 앞서 기념 식에서심대섭유도회장은장성유도회는지방의인물서원사우를 찾아 선양하고 조명하는 사업을 전임 박래호 회장이 주창하여 금 번 2회째를 맞게 되었다고 말하고 ‘만곡사의 가치와 보존·활용 방 안모색’의주제로하는학술대회는이를계기로만곡사와묵헌·취 금헌 선생의선양사업은한층 더박차를 가하게될 것이고 배향된 선현들의재조명의기회가될것이라고말했다. ‘만곡사가치와보존·활용방안모색’학술강 연가져 성균관유도회전남장성군지부,취금헌박팽년선생추배후묵헌공위상높아져 만곡사전경,①만곡사②별묘 ③숭절당(강당)④충효문⑤충절문⑥만곡사유허단향비⑦외삼문⑧남강봉공준열기적비⑨홍살 문⑩화장실 변주승교수 봉천대회장 만곡사(萬谷詞) 만곡사(萬谷祠) 배향인물 박팽년선생영정 만곡사봉안위패 봉여해선생영정 묵헌선생위패 송탄봉단의(松灘奉端懿) 송탄선생위패 만곡사관련자료검토 만곡재(萬谷齋)기문(記文) 취금헌의위패를받들어모시는글 <醉琴軒奉安文> 묵헌봉여해님에게아뢰는글 <告默軒奉公汝諧文> 만곡사건립정신의계승및활성화방안 맺음말 심대섭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