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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7월31일 목요일 2 (제223호) 기 획 이번학술대회는그동안드러나지않았던많은부분이신진학자 들에 의해 발표되었다.특히 박명희교수의‘눌재 박상의가족시에 나타난감성양상’에서는조부와형에대한감사와그리움,먼저간 아내에대한슬픔과애틋함,아우와아들에대한사랑과바람,감성 표출에대한미학적의미등선생가족에대한사랑과연민,정하정 (계명대학교)의‘기억되는이름,기념되는장소’눌재박상의충절에 대한 기억과 표상 형성에 관하여‘는 박상의충절에 대해 소개하고 충신에게내린사제문을통해그의의리사상을엿볼수있었고,김광 명(성균관대학교)의’눌재집의현대적활용방안‘교육,문화컨텐츠, 지역문화관광을중심으로’에서는눌재선생의송호영당을비롯한 태어난 절골 등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선생의의리,절의사상 등을청소년인성교육에활용할수있도록만화제작,책받침등학 용품에인쇄하여아이들에게친근하게접근할수있는방안등이제 시되어발표자들의주요내용을간추려소개해본다. 박상(朴祥)의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로, 1474년(성 종 5)에 광주광역시 서구 방하동(절골)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충 주(忠州)로,조부는성균진사(成均進士)박소(朴蘇)이고,아버지 는 증 의정부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 박지흥(朴智興)이다. 어머 니는계성서씨(桂城徐氏)로,생원서종하(徐宗廈)의딸이다.15세 가 되던 해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어머니를 봉양하며 백형(伯兄) 박정(朴禎)에게수학하였다. 그는 태어날 적부터 정신과 기운이 빼어나게 맑고 보통 아이들 과 달라 기억력이 매우 뛰어났으며,조금 장성해서는 스스로 학문 에힘써경전과역사에널리통달하였고,특히글짓는솜씨가날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18세 때인 1491년에 창평 현령(昌平縣令) 유 종한(柳宗漢)의 딸과 혼인하였다. 1496년, 23세의 나이로 생원시 에합격하였고,1501년에 정시 을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校書 館 正字)에 제수되었다. 그 후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병조좌랑(兵曹佐郞)등을두루지냈다. 1506년(연산군 12) 가을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을 때연산군의폐인(嬖人,애첩)의아버지인우부리(牛夫里)를장살 (杖殺)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우부리는 당시 딸의 권세를 믿고서 횡포를 부려 남의 부녀와 전원을 빼앗기까지 하였다.조정과 재야 에서 모두 근심하였지만,누구도 나서서 그의 죄를 논하지 못하였 다.박상은 이 일로 인하여 위기에 몰렸으나 중종(中宗)의 즉위로 처벌을 모면할 수 있었다. 11월, 부인 유씨(柳氏)의 상을 당하고, 생원정세(鄭稅)의딸과재혼하였다. 1507년(중종 2) 9월에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었다. 이때 재상과 훈구세력대신들이반정(反正)의공으로고위직을독점하자,공신 책봉의 부당함과 조정 인사제도의 파행을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특히, 종친(宗親)의 중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훈구대신들의 전횡에 맞서 지속적으로 간쟁함으로써 군주의 부담과 대신들의 반발을 동시에 자초하였다.사간원에 있는 동안 탄핵을 꺼리지 않 았으므로 꼿꼿하여 강직하다는 명성이 났지만, 결과적으로는 외 직(外職)인 한산 군수(韓山郡守)에 제수되었다.이에 사헌부에서 대간의 외직 제수는 부당하다고 이조를 탄핵하면서 논란이 이어 지니, 박상에게 종묘서 영(宗廟署令)과 소격서 영(昭格署 令) 등 의한직을이어제수하였다.박상은마침내모친봉양을위하여임 피현령(臨陂縣令)을자청하였고,이후고향광산(光山)으로돌아 와 독서에 전념하였다.이후,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거쳐 교 리(校理) 겸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등을지냈다.1512년에다시모친봉양을위하여담양부사(潭陽府 使)가 되었다. 이즈음에 임억령(林億齡), 송순(宋純), 정만종(鄭 萬鍾)등이박상을찾아와수학하였다.그가42세되던해인1515년 (중종 10)장경왕후(章敬王后)의 승하 이후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과함께단경왕후신씨(愼氏)의복위를요청하고,훈구 대신들의 잘못을 논척하였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고 전라 남평(南 平)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사면되어 복직되었으나, 의빈부도사 (儀賓府都事),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등을지냈다.박상은자신 의 언행이 끝내 정치적 중심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면 서도,성리학적 이상을버리지 않고 고립 속에서의 자율적 실천을 도모하였다. 1521년(중종 16) 충주목사(忠州牧使)가 되었을 적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의탁할데가없어진당시의사림인사들을 모두 보살펴 주었으므로 김세필(金世弼), 이자(李츤 ), 이연경(李 延慶) 등이 모두 박상에게 의지하였으며, 1526년에는 중시(重試) 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문명(文名)과 학덕을 다시금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미 정치적으로 배제된 인물이었던 만큼 승진에는 한계 가있었고,나주목사재직중에는병을이유로낙향하였다.1530년 (중종 25)3월에 병이 점점 심해져 4월에 향년 57세의 나이로 별세 하였으며,시호는문간(文簡)이다. 박상은 시종일관 절의와 학문을 겸비한 인물로서 훈구세력과 사림의 교체기에 일관된 도학적 삶을 견지한 인물이라 할 만하다. 그의학문은경사(經史)에능하고문장에뛰어났으며,원우(元祐) 의완인(完人)으로비유되며지조와강직함을구현한인물로추앙 받았다. 그의 학덕과 절의는 성현(成俔), 신광한(申光漢), 황정욱 (黃廷彧)과 더불어 서거정(徐居正) 이후 븮사가(四家)븯로 불릴 만 큼문장가로서도높이평가되었다.박상의생애는관직과절의,문 학과도학이교차하는조선중기사대부의모범적삶의궤적을제 시한다. (이상전주대학교한문학과강사김광명의눌재집해제에서옮김) 박명희는 논문의 맺음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본 논 문은 박상의 가족시 총 16제 20수를 대상으로 연구하였다.그리고 본연구가원만히끝난다면,박상가족시에나타난감성양상의전 반적인면모와함께조선중기를살았던사림의삶이시작품표출 과무관하지않다는것을알수있을것으로전망하였다. 가족시는 박상을 기준으로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다시 세 층위 로 구분하였다.첫 번째 층위에 해당하는 가족시는 박상보다 위에 자리하는조부박소와형박정과관련한작품으로,븮전조고묘븯,븮몽 백씨븯등이해당하였다.이들작품을통해박상은감사와그리움의 감성을 드러내었다.두 번째 층위에 해당하는 가족시는 박상과 수 평적위치에놓인진양유씨와관련한작품으로,븮협곡도삼가븯,븮기 몽븯등이해당하였다.이들작품을통해박상은슬픔과애틋한감성 을 드러내었다.세 번째 층위에 해당하는 가족시는 박상보다 아래 에자리하는아우박우와두아들민제와민중과관련한작품으로, 븮영국 차제운븯,븮중원북 진 별사제귀관동막븯,븮묵매죽븯,븮황산개태사 수철구 차제운븯, 븮봉수원충화사제운븯, 븮차사제 운븯, 븮추석완월 사제 모정치주븯,븮문사제접매색성이절븯,븮금탄송사제입경븯,븮문사제자장 령초배집의이시위하븯,븮옥천수리홍간송자백개잉서문관황차시 사제창방시률차운사지븯,븮정진사여자민중입속리산독서븯,븮계미사 월팔일 민제생일유감븯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박상은 이들 작품을통해사랑과미래를바라는마음을나타내었다. 이들 가족시를 살펴본 결과 감성의 강도가 최고로 센 작품으로 는븮몽백씨븯와븮협곡도삼가븯라고결론을지은다음에이들시가미 학적비평 용어중에 븮침울븯에해당한다고 보았다.그리고이 두작 품은 특히,감성을 스스럼없이 나타내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 동을주는데이는결국박상이평소감정을숨기지않고행동한것 과일맥상통하는측면이있다고언급하였다.도하였다. 이에어느날잠시시간을내어회덕정민역남쪽근처(현대전시 문지동)에있는조부박소의산소를찾아가성묘후시를남겼는데 인용하면다음과같다. 자단나무향기는생기넘치게올라가니(紫檀香氣上춘좆),슬픈 정령이흰구름에서내리는듯하네(悽悽精靈下白雲),옹중의늙은 몸은비바람으로추해지고(翁仲老身風雨醜),큰비석의메마른면 엔성명이향기나네( 銀 碑枯面姓名芬),시서가있어서과거시험을 계승했으니(桂科似續詩書在) 조부님이 박 넝쿨 재배하느라 애쓰 셨네(匏蔓栽培祖考勤) 이제 충주 목사 되어 낮에 비단옷 입으니 (今作芮州眞畵錦) 두어 병의 관청 술은 명군한테서 왔네(數甁官 酒自明君) 위시의시제를풀이하면븮조부의산소에성묘하다븯이다.박상의 조부박소는은산군사를역임하였고,이조판서에증직된바있다. 박상은제목소서에서조부의산소가뷺회덕정민역남쪽근처에있 다.(在懷德貞民驛南近)”라 했는데, 회덕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 덕지역의옛이름이다.충주와회덕은같은충청권에있기때문에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박상은 충주 목사 시절틈을내어조부의산소를잠시다녀갔던것이다. 우선 수련에서 성묘를 왔다는 분위를 냈다. 1구에서 말한 븮자단 향(紫檀香)븯은자단나무를잘게깎아서만든향을말한다.이자단 향이생기넘치게위로올라가니그향을맡은정령이흰구름을타 고내려오는듯하다라말하여마치땅에있는박상과하늘에있는 조부가만난듯이표현하였다.이어함련에서는산소주변의모습 을 묘사하였다.1구에 말한 ‘옹중(翁仲)’은 무덤 사이에 세워진 석 인(石人)븡석수(石獸) 등을 가리키며, 2구의 븮풍비( 銀 碑)’는 공적 을 적고 덕업을 기리는 거대한 석비(石碑)를 말한다.그런데 옹중 의 늙은 몸은 비바람으로 추해진 반면,큰 비 석의 메마른 면엔 성 명이 향기롭다라 표현하여 옹중과 풍비가 서로 대조적임을 간접 적으로나타내었다.풍비에적힌성명은역시조부의이름박소로, 븮분븯(芬)자를 넣어 그 이름에서 향기가 나는 듯 하게 표현하였다. 경련에서는조부박소를칭송하며감사의마음을표출하였다.1구 에서말한븮계븯(桂)는과거시험에급제한것을뜻하는한자어로,진 나라 무제(武帝) 때 극선( 茶詵)이 현량대책(賢良對策)에서 장원 을 하고는, 소감을 묻는 무제의 질문에 “계수나무 숲의 가지하나 요,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이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답변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그리고 븮사속(似續)븯은 선조의 유업 (遺業)을 계승한다는 의미로,븮시경븯븮사간(斯干)븯에 “선조를 계승 하여 담장이 백도나 되는 집을 지었네.(似續 삽 祖 築室百堵)”라는 말에서인용하였다.’詩書'는시와글씨를아울러의미하는것으로 볼수도있고,븮시경븯과븮서경븯책을말한다고도볼수있다.둘중어 느것을의미하든지1구에서박소가남겨준시서가있어서그로인 해 과거시험에 합격했음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어 2구에서 “조 부님이 박 넝쿨 재배하느라 애쓰셨네”라 말했는데,이 구절의 ’박 넝쿨(匏蔓)'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 로 알 수는 없다. 열매 박 이달린넝쿨을뜻하는것으로본다면,상징적인의미로쓰였다고 볼 수없다.그러나 만일 븮朴븯자를 대신해 븮포(匏)븯자를 썼다면,조 부 박소가 후손들을 기르느라 애를 썼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마 지막 미련에서는 박상 자신이 충주 목사가 되어 비단옷을 입고와 술을올리게된것을언급하였다.시말미에“그때동관이 술 두 병 을보내주어제사에쓰게했다.(時同官送酒二甁備奠)”라 말한 소 주가있으니,미련2구에서말한븮明君븯은곧,술을보내준사관(同 官)을가리킨다. 이상과 같이 박상은 븮조부의 산소에 성묘하다븯 시를 통해 조부 박소에대한감사의마음을전달했는데,첫번째층위의두번째시 에서는형박정을그리워하는정감을드러내었다. 한번 이별 후 가까이 하지 못해(一別無由近),할미새 나는 들판 에 풀만 무성하네( 耳 原草獨深) 시서를 치운지 며칠이 되었던가 (詩書埋幾日)형의 문필은지금까지그대로라(翰墨到如今)먼곳 까지 와서 꿈에 나타나시니(遠地來和夢) 추운 밤에 거듭 마음이 슬퍼지네(寒宵重愴心) 강남은 또 만리의 먼 길이라(江南還萬里) 일어나 앉아 옷깃에 눈물 흠뻑 적시네(起坐淚盈襟) 이 시의 시제 를 풀이해보면 븮큰형을 꿈꾸다븯이다. 시제에 나온 큰형은 역시 박 정을가리킨다. 하촌공은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게 아름다웠고, 덕행과 기량이 순수하게 이루어졌으며, 문장과 학술을 뛰어나게 스스로 터득하 여 어진 사우들이 그를 추중하여 말하기를 뷺몹시 뛰어나다”라 하 였다.점필재가호남관찰사가되어예를두터이하여대하여말하 기를“참으로조정에서일할그릇”이라하였다.공은그로인해점 필재와교유하며많은지도를받았다.두아우를가르쳤는데,모두 명망 있는 선비가 되었다. 당시에 일컫기를 뷺송 나라에 부자 삼소 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형제 삼박이 있다뷻라 하였다. 18세에 생원 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저술은 병화에 잃어버 렸고,븮서석산부븯1편이전한다. 위내용에서는총네가지를언급하였다.첫째,박정의자질과덕 행,기량,문장과 학술 등을 말하였고,둘째 점필재 김종직과의 인 연을말하였으며,셋째박상과박우두아우를가르친것을말하였 고,마지막으로 18세에 생원이 되었으나 일찍 세상을 떴다는 것을 말하였다.이내용대로라면박정이32세의나이에세상을뜨지않 았다면,나라를위해큰일을했을것이라추정한다.이런큰일을할 수도있었고,그토록부친을대신해의지하던형이이른나이에세 상을떴으니박상이받은슬픔은깊었을것이며,그리움역시컸을 것이다.어떤사람에대한그리움이크면간혹꿈에나타나기도하 는데, 박상이 형 박정 꿈을 꾼 것도 바로 그 그리움이 내재해 있었 기때문이다. 이 밖에도 진양유씨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로 인해 느낀 깊은 슬픔등을적었는데,박상은아내를잃은자신의처지가마치반악 (潘岳)과 같다라고 하였다.반악은 晉나라의 시인으로,아내의 죽 음뒤에그를애도하는시븮도망시(悼亡詩)븯3수를지은바있다.그 리고“갑자기아내잃어고분고통갖게하는가(忽鼓子休之盆)”라 말하였다.이 내용은 장자(莊子)와 관련된다.장자가 아내가 죽어 혜자(惠子)가문상하러갔더니장자가다리를뻗고앉아서동이를 두드리며노래하고있었다.그래서그이유를물어보니“본래는삶 이란것도형체란것도없었는데,이제본래없는상태로돌아갔으 니 슬퍼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대답 했다 한다. 그래서 '고분 고 통'을아내의상을당하는것을뜻하게되었다. 이와같이박상은븮의자도부븯를통해아내의죽음을슬퍼했는데, 죽음에대한슬픔과그를애도하는마음이상세히담겨있다. 계명대학교정하정은논문에서박상이충절의표상으로자리매 김 되는과정을집단기억과문화 기억이론의관점에서 고찰하였 다.박상의폐비신씨복위상소는당대에는정치적갈등과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라는 시련으로 이어졌지만, 이후 후대의 정 치적 정황과 도덕적 해석을 거치며 점진적으로 충절의 전범으로 부상하였다. 초기의 행장이나 묘지명에서 간략히 서술 되었던 복 위 상소 사건이 기묘사화 이후 기묘사림의 재조명 속에서 적극적 으로해석되었고,숙종과영조,정조대를거치며국가권위에의해 공인되어 충신의 표상으로 정전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박상의 충절에대한집단기억의형성과정을보여준다고할수있다. 한편,박상의 충절 표상은특정장소와 결합하며 더욱 구체적이 고 지속적인 문화기억으로 확립되었다. 소요당은 본래 교유와 은 일의 공간이었으나 박상이 심정을 풍자한 시문으로 인해 풍자의 상징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특히 심정이 기묘사화를 일으켰던 인 물이었기 때문에 박정의 풍자는 그의 강직한 품성과 충절로 결부 될여지가컸다.따라서소요당김정역시박상의충절을간접적으 로 표상하는 공간이 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삼인대는 박상 등의 세 사람이신씨복위상소를준비한 구체적인 충절실천 현장으로 기억되었으며,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삼인대 에 각인된박상의충절 표상은개인이나국가의 도덕질서를환기 하는살아있는윤리실천의장으로소환되었다. 결국 박상의 충절 표상은 하나의 사건이 도덕적 의미를 중심으 로 재해석되고 그것이국가의공인을 받으며특정장소를 통해기 념화 되면서 지속적으로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 형성되고 강화 된결과였다고할수있다. 본연구를통해 개인의윤리 실천이 시간의흐름 속에서국가적 문화 기억으로 형성되고 고착되는 과정을 면밀하게 확인할 수 있 었다.향후 이러한 연구 방법으로 대상을 확대하여 동아시아 유교 정치문화속다양한충절표상이나장소관련기억연구를진행한 다면유의미한결과를얻을수있지않을까한다.이는훗날의연구 과제로남겨둔다.라고하였다. 폐비 신씨의 복위 문제가 영조 대에 이르러 해결되면서 박상은 충신으로 국가적 공인을 받는다.1739년 영조는 먼저 신씨 복위를 창도한 인물이라고 박상을 칭찬하며 그 자손을 등용하도록 전교 를내리고이어치제한다. 옛날 우리 중종 때(昔我中廟) 여러 현인들이 일어났네(作興群 哲) 경도 그때에(卿於時也) 선비 중에 한 사람이었네(士類中一) 븣(중략)븣 같은 시대 같은 조정에(倂世同朝) 신하 김정과 같은 이 있었네(有若臣淨)왕후의 자리를 잃게 되자(壺極失位)슬프고 답답한심정모두절절했네(共切悲鬱)한목소리로항거하는상소 올렸으니(齊聲抗章) 말은 매우 간단하고 명료했네(言甚直픽 ) 강 상을 붙잡고인륜을바로잡으니(扶綱正倫)충성과의리가늠름하 였네(忠義凜然) 간사한 무리가 독기를 부리니(群壬煽毒) 재앙의 기색이 하늘까지 뻗쳤네(禍色彌天) 꾸며낸 죄가 매우 참혹하여 (羅織孔慘)감옥에 갇혔으나그의죄아니었네( 맬府非罪)사람들 은 모두 두려워했으나(群情咸懼) 문정공만이 홀로 아뢰었네(文 正獨啓). 영조가 하사한 치제문일부로,박상에 대한 충절 기억이 국가의 제도속에서재구성됨을보여준다.이글은초반부에서중종대기 묘사림의 반열에 박상을 놓고,중반부에서 중종의 비신씨가 폐위 되는배경을서술한다.이러한배경속에서박상이신씨복위상소 를올린것에대해“강상을붙잡고인륜을바로잡으니충성과의리 가늠름하였다뷻고극찬한다.이는국가의도덕적질서를회복하는 공적인의미로박상의충절이갖는의의를확대한다.이에의하면, 박상의상소는단순히정치적행위가아닌,유교국가의이념을구 현하는행위가되는셈이다.또한박상이이상소로인해비판을받 고 유배되는 과정을 간사한 무리가 죄를 꾸민 것이라고 설정하여 박상의 무죄를 강조하고 그 충절의 정당성을 부여한다.인용문 마 지막의 문정공 조광조만이 박상을 변호했다는 내용 또한 박상의 행위가 결국 사림의 도학 정치의 이상과 결부됨을 암시한다.이러 한 제문을통해서박상의 충절에대한표상은 조정의일시적평가 가 아니라, 후대 국가가 공인하는 정전적(正典的) 서사로 완결된 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박상에 대한 충신으로서의 국가적 공인은 정조대에도연이어나타난다. 1788년(정조12)에온릉령최창국(溫陵令崔昌國)은상소하여, 단경왕후의 폐위를 유도한 박원종 등의 관직을 추탈하고 단경왕 후의 능인온릉에 비석을세울것을청하며박상의 충절을 언급한 다.그로부터7년이지난1795년(정조19)에는호남의유생들이상 언하여 박상의 신위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도록 하는 이른바 부조 지은(不 튐 之恩)을 청한다. 정조는 이를 허락하고 박상을 위해 치 제한다. 경은 일개 수령으로 임명되어(卿一墨綬) 대궐문에서 부르짖으 며 피를 뿌렸네(叫閣瀝血) 무너지려는 기강을 일으켜 세우니(樹 紀將頹)이미 죽은 간악한 자까지 주벌했네(誅奸旣骨)곧은 말과 바른기운은(直辭正氣)온통하늘끝까지닿았네(摩切穹玄)천길 벼랑처럼 우뚝하니(壁立干 쵱 ) 그 끼친 기풍은 늠연하였네(遺風 凜然)븣(중략)븣삼인대에는(三印之臺)소나무는 늙고 돌은 갈라 터졌네(松老石 펙 )영령이 없지 않을 것이니(英靈不泯)술과 제문 을함께올리네(酒與詞 ) 정조의 명에 의해 지어진 치제문(致祭文)의 일부이다.우선,박 상의상소장면을븮대궐문에서부르짖으며피를뿌림(叫 혁 瀝血,규 창력혈)븯이라고 극적으로 구성한 대목은 비장함을 더한다. 또 ‘이 미죽은간악한자까지주벌하였다(誅奸旣骨,주간기골)’,‘온통하 늘끝까지닿았다(摩切窒玄,마절질현)븯,븮천길벼랑처럼우뚝하다 (壁立千쵱 ,벽립천인)븯등의 과장된 표현은 박상의 충절을 한층 더 숭고하게승화한다. 마지막에 ‘三印臺(삼인대)’에 대한 언급은 박상에 대한 충절 표 상의 공간적 상징성을 강화한다. 이러한 면은 영조의 치제문에서 는 볼 수 없는 점이다.다시 말해,영조의 치제문에 의해 박상의 충 절을 재해석하는 국가적 문화 기억이 형성되었다면, 정조의 치제 문에 의해서는 박상에 대한 충절의 표상이 보다 강렬하고 확고한 위상을 확보하게 된다.그런데 정조의 치제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 는다.신씨가 단경왕후로 복위되고 60년이 지난 1799년 에 정조는 다시 치제문을 내린다.이처럼 박상의 충절과 의리 정신은 조정에 서도공인하고있는것이다. 성균관대학교 김광명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문인이자 강직한 선비였던눌재박상(朴,1474~1530)의문집븮눌재집(訥齋集)븯의현 대적활용방안을교육,문화콘텐츠,지역문화관광의세가지측면 에서모색하고자한다고전했다. 븮눌재집븯은당대지식인의사상과문학적면모를담고있는귀중 한 문헌으로,그의 강직한 선비 정신,유불도 사상의 융합적 사유, 그리고자연친화적시풍은현대사회에다양한가치를제공할수 있다. 특히중종비신씨복위사건(中宗妃愼氏復位事件)과같은주요 사건을 통해드러나는그의 대의명분중시 사상은 인성교육의 중 요한 자료가 되며, 그의 문학 작품은 중·고등학교 한문과 한국 산 문 교육의 심화 학습에 기여할 수 있다.또한,그의 생애와 작품에 나타난극적인요소들은웹툰,드라마,애니메이션,게임등다양한 문화콘텐츠의 원천 서사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송호영당 (松湖影 堂)을비롯한그의활동지및유적지를중심으로한문학기행코스 와연계상품개발은지역 문화관광활성화에이바지할것으로 판 단된다. 본연구는븮눌재집븯이지닌고유한가치를현대적맥락에서재조 명하고,이를 통해 고전의 대중적확산과 활용 가능성을 제고하는 데목적이있음을밝혔다. 그리고 맺음말을 통해 븮눌재집(訥齋集)븯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현대적 맥락에서 재조명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확산하며 활용 가 능성을 높이는 데 목적을 두었다.우선, 교육 자료로서 븮눌재집븯의 활용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박상의 생애와 문학은 인문교육 및 윤 리교육의중요한자원이될수있으며,특히중종비신씨복위사 건을 통해드러나는 그의대의명분중시 사상은인성교육의 중요 한 자료가 된다.또한,그의 문학작품은 중·고등학교 한문과 및 한 국 산문 교육의 심화 학습에 기여할 수 있으며,실제 교수·학습 지 도안설계를통해그의자연친화적시가작품이현대사회의생태 전환교육및인성함양목표달성에효과적인소재가될수있음을 구체적으로 제안하였다.그의 강직한 관료 생활은 현대 사회의 청 소년들에게올바른가치관과공직자윤리를가르치는데효과적인 사례가될수있다. 다음으로, 문화콘텐츠 자원으로서 븮눌재집븯의 잠재력을 탐색하 였다.박상의생애와작품에나타난극적인요소들은웹툰,드라마, 애니메이션,게임등다양한문화콘텐츠의원천서사가될수있다. 특히 븮눌재 박상과 고양이 전설븯과 같은 이야기는 판타지 요소를 가미한웹툰이나애니메이션으로개발되어대중적흥미를유발할 수있으며,신비복위상소와우부리장살사건은정치사극이나수 사극 형태로 변주하여 현대적 시사점을 담은 드라마로 제작될 수 있음을 논의하였다.이러한 콘텐츠는 OSMU 전략을 통해 파급력 을극대화하고,박상의강직함,정의로움,연대정신과같은보편적 가치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는 데 활용될수있다. 마지막으로,지역문화관광활성화측면에서븮눌재집븯의활용방 안을 제시하였다.송호영당을 비롯한 그의 활동지 및 유적지를 중 심으로 한문학 기행코스 개발과연계 상품개발은 지역문화관광 활성화에 이바지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광주,나주, 순창 등 박상 관련문화유산이지리적으로인접하게분포되어있음을활용하여 ‘호남 문학·절의 투어븯와 같은 광역 관광 코스 개발 가능성을 제시 하였고,무등산등산로에유산시현판을설치하고QR코드를통해 디지털콘텐츠와연계하는방안을제안하였다. 또한, 순창 삼인대 기념행사를 몰입형 퍼포먼스로 발전시키고, 븮눌재집븯 테마 문구류, 븮고양이 전설븯 캐릭터 상품, 삼인대 상징 기 념품등지역특화기념품개발을통해지역경제활성화에기여할 수있음을강조하였다. 이러한 논의를 종합해 볼 때,븮눌재집븯은 옛 문헌에 그치지 않고 현대사회의교육,문화콘텐츠,지역문화관광등다양한분야에서 새로운가치를창출하며대중과소통할수있는매개체가될수있 음을알수있다.본연구에서제시된구체적인활용방안들이실제 정책 및사업으로 이어져고전의대중적 확산과활용가능성을 제 고하는데기여하기를기대한다.이를위해서는학계,콘텐츠제작 자,지역사회및정부기관간의유기적인협력이필수적이며,지속 적인 연구와 관심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라며 다향한 활용방안 등을제시했다. 븮눌재박상,시대의기억과현대적지향븯학술대 회요지 박상의생애와학문 눌재박상의가족시에나타난감성양상 눌재박상의충절에대한기억과표상형성에관하여 눌재집(訥齋集)의현대적활용방안 -교육,문화컨텐츠,지역문화관광을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