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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훈익(宋勳翼)은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9년 성주군 초전면(草田面)에 살고 있었으며 서울에서의 3·1독립운동에 이어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전국적으로 퍼져 우렁찬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이곳 유림들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미 3월 28일 성주읍 장날에 선남면(船南面)에 사는 이현호(李玄琥) 등이 독립만세를 부른 일이 있으나 큰 운동으로 확대되지는 못하였고 4월 2일 유림측과 기독교측이 연합전선을 펴 봉기함에 따라 비로소 본격적인 만세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때 월항면(月恒面)의 유생 이기정(李基定)은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 봉기상황을 알게 되어 같은 유생이요 동지인 송인집(宋寅輯)과 더불어 군내 양반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이들은 그후 송씨문중(宋氏門中)에서 유력한 수 명을 불러내어 운동을 협의한 후 성주읍 장날을 기해 궐기할 것을 계획하고 군내 유림에게 연락하여 규합체를 형성하는 등 의거준비를 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모여든 700∼800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나 일경들의 발포로 계속적인 만세시위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그는 산위로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