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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4월30일 화요일 2 (제208호) 관향조 종친회 지난해4월11일오전8시30분경에발화된강릉산불 은 강한 바람을 타고 경양사를 삼낄 듯 하였고,옆에 소 재한단천군사공의묘역또한화마를피하지못하며종 원들의 시름이 깊었다. 그리고 1년 종원들은 한마음으 로이를이겨내며 지난13일 묘역에모여전사(奠祀)를 봉행하며 그날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며 선조의 음덕 을기렸다. 이날 제향에는 종중의 원로 종승(鍾承) 현종의 집례 로기원(基元),호균(鎬均,도의원),용집(容執)현종이 헌관으로 각각 헌작하고 용백(容栢) 감사의 독축으로 엄숙봉행되었다. 강릉박씨는 신라 제5대 파사왕의 31세손으로 명종17 년(1187년)형부상서 백임지,내시장군 이문중,공부상 서 조원정, 상장군 석린, 병마사 석중, 석부, 주적 등 의 모반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 되었으며, 신종2년(1199년 乙未)에 중서시랑평장 사(中書侍郞平章事)로계림군(鷄林君)에봉해진휘순 (諱 純)이 치사(致仕)하여 강릉으로 내려가 여생을 마 치니 후손들이 그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본관을 강릉으로삼게되었다. 문충공순의현손지계는공민왕때한림학사(翰林學 士)로포은정몽주박상충(반남인-금성부원군)등과함 께 정사(政事)를 의논하였으며 절의를 지켰다. 그리고 그의아들5형제중넷째자검은1364년(공민왕13년)에 태어나서 태조원년(1392년)에 문과에 올랐고 조선 세 종 때 단천 군사(端川 郡事)겸 안렴사(按廉使)를 지내 면서 은혜로운 업적을 높이평가 주민들이 동비(銅碑) 를세워기념하고 의주(義州)구암사에 배향되었으며, 단천공이아들3형제를두면서번성하였고조선조에들 어와문과급제자7명을배출,그후손들은강릉의각지 역으로 흩어져 각기 집성촌을 이루며 토호성씨로 자리 잡아오늘에이른다. 제향후가진정기총회는용백감사의감사보고에이 어 △2023년도 사업보고 및 회계결산 △2024년 사업계 획 및 예산안 등을 상정 원안 처리하고, 임원회에서 추 대된 박상권 회장 감사 (연임)를추인했다. 지난해 주요 경과는 강릉 산불 피해목에 대 한 벌채, 관설당공파대 종회 참석 및 활동, 강릉 박씨 대종보(가칭)책자 발간 착수 등이고 2024 년 주요 사업으로는 지 난해시작된강릉박씨대 종보 발간으로 현재 교 정이 마무리 되어 조만 간 인쇄될 예정으로 1천 부 발행하여 종원과 각 급 도서관에 배부될 예 정이다. 한편 치규 회장은 수년간 사무국장으로 함께해온 만균(滿均) 사무국장에게 공로패 를 전달하며 치하했 으며, 이임사를 통해 서는코로나19로인해 어려움도 많았고 또 한 아쉬움도 있었던 4 년이었으나 원로 고 문님과 종원 여러분 의 성원으로 무사히 임기를마칠수있어감사하다고말하고신임회장을도 와더욱발전하는종친회를만들어나갈것이라고말했 다. 박치규회장은경포대일대대형산불에경양사문화 재를피해없이지키고그와중에경양사모선재보수를 마치는등크고작을일들을해냈다.그리고숙원이었던 대종회를 상징하는 심벌(symbol)을 만들어내 뱃지와 회기를 만들었고, ‘강릉박씨이야기’ 책자발간 등 많은 족적을남겼다. 신임박상권회장은평생후학을지도해온교육계원 로이다. 차분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삼가공종친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하며 종사발전과 선조 현창사업에 적극 나섰으며, 지난해 착수한 강릉박씨대종보 편찬위원장 으로 훌륭한 책자 발간을 통해 강릉박씨를 대내외적으 로알리고있다.그리고취임사를통해서는원로고문님 들의유지를잘받들어원만히운영될수있도록최선을 다할 것이며, 이를 위해 많은 채찍과 격려를 당부 드린 다고말했다. 주(註)- 전사(奠祀), 전(奠)이라는글자는제(祭)와뜻이같으면서 도쓰임새가다르다. 전은무덤에들어가기전에사용한다.그이후 제를쓴다. 전사(奠祀)와제사는구분한다. 전의윗부분추(酋)는 주 (酒)를 뜻하며 아랫부분 대(大)는 받침대인 기가 변한 글자다. 추는 ‘여씨춘추’에서 농사를 주관하는 관리라고 했다. ‘예기’는 주관(酒 官)의우두머리를대추(大酋)라했다.농사와술은일맥상통한다.중 국에서가장오래된자서인‘이아’는종이라했다.전은곧끝이자죽 음으로제사를올리는것이다. /박용백명예기자(강원강릉시지부) 강릉박씨대종회定總븡단천군사전사(奠祀)봉행 강릉박씨비조(鼻祖)단천군사공전사후종원들이함께하고있다. 박상권신임회장취임븣뷺종원들의뜻받들어종중발전에최선다할터뷻 제향광경(독축) 정기총회에서치규회장(左)이다년간 사무국장을보아온래균국장에게공 로패를 전달하며 치하하고 함께하고 있다. 신임박상권대종회장이치규회장 으로부터회기를넘겨받고흔들어 보이며대종회발전에자신감을보 여주고있다. 단종의 신하로 죽음으로서 충성 을 다한 육신(六臣)이 있고 풍진세 속의 불의를 박차고 입산(入山)하 여 반정(反正)의 단성(丹誠)을 다 한 아홉분이 있으니 이중 영해박씨 문중의단종절신7현(賢)은곧은절 개로 형(兄)·제(弟)·자(子)·질(姪) 이같은길을함께해이분들의위패 를 봉안한 구은사 춘향이 3월 상정 (上丁)을 맞은 지난 13일 강원도 철 원군 근남면 호국로7003-23(사곡 리)구은사에서 지역유림 주관으로 박기준철원군의회의장,엄기호도 의원,정만식철원종합장사시설설 치 추진위원장이 헌관으로 추대되 어 각각 헌작하고, 임겸순, 정태룡 씨가집례와축관으로참례했다. 영해박씨는 고려와 조선 초 특별 한 신임으로 조정에 출사하여 요직 을 맡았다. 세종대왕으로부터 총애 를 받아오던 평양서윤 영해박씨 박 창령(朴昌齡) 선생의 장남 박낭은 병조정랑,차남박도는판중추부사, 삼남박제는예조좌랑,박낭의아들 박규손은 예빈경, 박천손은 사직, 박도의아들박효손은형조참판,박 인손은 병조정랑, 박계손은 병조판 서등모두쟁쟁한직책에있었으나 이들중박도박제박규손박효손박 천손 박인손 박계손 등 7명과 매월 당김시습과정재조상치등이절의 를지키며강원도철원군근남면초 막동으로와함께은둔해이들을구 은(九隱)이라 한다. 은입(隱入)해 서 산에 의지해 수간초막(數間草 幕)을 치고 그곳에서 거처하면서 아홉분이 자규사(子規詞) 한편씩 을 읊어서 단종을 지극히 사모하였 으니 그 사(詞)의 문사(文辭, 문장) 가 글귀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정성의 피눈물이 서리어 있 어그들의충절을엿볼수있다. 구은사는 조선시대 단종복위를 도모한 구은(九隱)의 절의를 숭상 하기 위해 1818년(순조18)에 영해 박씨 후손들과 관내 사림의 발의로 건립되었다. 불사이군의 마음으로 초막동에 내려와 은거하며 단종의 복위를 도 모했으나뜻을이루지못한지3백50 여 년만이다.그러나 1864년 흥선대 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의해 철거되 었다가 고종3년(1894년)에 이 터에 설단(設壇)하여구현(九賢)을다시 배향하고, 1921년 중건되었으나 한 국전쟁의 와중에 사우가 완전 소실 되어 제향이 중지되다가 1960년 박 규손의 15대손 박재민의 발의로 초 막동에서 김화군수의 초헌으로 노 천봉행(露天奉行)되었다. 이후 1971년 가 사우(假 祠宇)를 부설하고 제례를 이어 오다 1977년 영해 박씨 후손과 사림제현의 찬조 로 신 사우(新 祠宇)를 중건하고 9 월의 상정일에 준공 및 추계제향을 올렸다. 구은사 제향은 매년 음력 3 월과9월상정일에봉행된다. /자료제 공박용옥단성유리대표(영해박씨后) 강원철원구은사춘향봉행 단종절신구은(九隱)의절의기려 철원유림주관 기묘명현 도원재 박세희 선생과 공의백형이자스승인송촌박세훈, 인재홍섬의위패가봉안된경기화 성안곡서원춘향이지난13일지역 유림주관으로 봉행되었다. 이날 제 향은봉안된선현의높은학덕을기 리기 위해 아침 일찍 사우(祠宇)를 찾은 유림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가 운데 경애왕릉 전(前) 참봉으로 종 중회장을 맡고 있는 종송(鍾淞) 회 장의 집례로 김남회(金南會) 안곡 서원장, 화성문화원 유지선(柳志 仙) 원장, 수원대학교 박철수(朴哲 秀) 총장 순으로 각각 헌작하고 수 원향교 이백영(李百永) 전교의 독 축으로40여분에걸쳐진행되었다. 제례 후 가진 음복례와 분포례에 서 김남회 원장은 행락(行樂)을 뒤 로하고 선현의 고귀한 학덕을 기리 기위해함께해준지역유림과종중 관계자 여려분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이어종송회장은지역유림 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종중에 서는배향된선현의높은도학을계 승발전 시키는데 최대한 지원을 아 끼지않을것이며이를위해지역유 림들의지도편달을당부했다. 안곡서원은 도원재 박세희, 송촌 박세훈, 인재 홍섬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지방교육의 일익 을 담당해왔다. 1666년 인재(認齋) 민시중(閔蓍重,1625~1677)이 남양 에 부임하여 도원재 박세희 선생의 유풍(遺風)을상상(想像)하고유생 들의 공송(公誦, 공론을 쫓아 사람 을 천거함)을 수탐(搜探)하여 사실 을 찾아냈다.이에 우암(尤庵)선생 에게 가서 의논하고 서원을 창립했 다. 1667년 상량을 올리고 1668년 (현종 9)에 박세희(朴世熹) 선생의 위패를모셨다. 1670년에 박세훈(朴世勳), 1700 년(숙종 26)에 홍섬(洪暹)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721년(경종 1)에 ‘안곡(安谷)’이라고 사액되어 1729 년(영조5)사액이취소되었다가17 40년(영조16)회복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 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부 근에매안(埋安)하고,그뒤지방유 림과 문중의 협력으로 1976년 복원 현재에이른다.강당은1986년5월2 0일 화성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 되었으며, 상주(상산)박씨 상암공 파문중에서관리하고있다. 도원재 선생과 송촌 선생은 세종 조(世宗朝)에 군자감부정(軍資監 副正)을 지내고, 의영고 직장, 공조 정랑, 안산군수, 풍덕군수, 평산부 사 등으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 는 등 애민정신으로 가득하여 자헌 대부이조참판,호조판서겸지의금 부사에 증직된 판서공 휘 사화(士 華)의 아들 4형제 중 첫째인 세훈 (世勳)의 호는 송촌(松村)으로 중 종(中宗)때현량과(賢良科)에천거 되었으나벼슬에뜻을버리고,향리 남양(南陽)으로 돌아가 후진양성 에진력하였으며,기묘사화후복관 되어통훈대부제용감첨정이고,인 종 때 통정대부 이조참의로 증직되 었다. 판서공의 셋째인 세희(世熹)의 號는 도원재(道源齋), 1510년(庚 午)에 진사시 1등 5인에 합격하고 1 514년(甲戌)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 제하여 홍문관 전한으로 호당(湖 堂)에뽑혔고,홍문관수찬,교리,이 조좌랑, 충청도도사, 사헌부지평· 직강·헌납, 병조정랑·검상·사인·응 교·지제교·사간,성균관 사성·전학 , 승정원좌승지 재임 중 기묘사화(己 卯士禍)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생을 마쳤 다.인조조에복권되고가선대부사 헌부대사헌겸동지경연춘추관,성 균관사, 홍문관 대제학에 증직되었 다. 현종 무신년(1668)에 청원건의 에 의하여 기묘명현으로 학문 명절 이특별한10인에들어자헌대부이 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오위 도총부도총관 좌빈객으로 추증되 고 시호 문강(文剛)이 내려졌다.백 씨 송촌공과 같이 안곡서원에 배향 되었고, 운곡공, 남포공과 함께 전 남순천의이천사에배향되었다. 인재(忍齋)홍섬(洪暹)의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이다. 조광조(趙光祖)에게 수 학했다. 1535년(중종 30) 이조좌랑 으로 재직중 김안로(金安老)의 전 횡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허항(許 沆)에게 무고를 당해 흥양(興陽)에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제거 된 후 복귀하여 수찬·부제학·경기 도관찰사·대사헌을 역임했고, 1552 년(명종 7)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이어좌찬성·이조판서·대제학등을 역임했으나 1560년 권신인 외척 이 량(李樑)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사 직 당했다. 1563년 이량이 제거되자 판의금부사로 복직했고, 홍문관·예 문관대제학을거쳐1567년(선조즉 위) 예조판서에 올랐다. 같은 해 명 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 (院相)이 되어 정무를 처결했으며, 다음해 우의정이 되어 권신 남곤 (南袞)을 탄핵하여 관작을 박탈했 다. 1571년 좌의정에 올랐으며 이어 영의정을 3회 중임했다. 1579년 병 으로 사임하고 영중추부사로 전임 했다.저서로 븮인재집븯·븮인재잡록븯이 있다.시호는경헌(景憲)이다. 경기화성안곡서원제향 도원재박세희,송촌박세훈,인재홍섬선생의위패봉안 지역유림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