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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2월31일 금요일 2 (제180호) 기 획 밀성박씨충간공파인터넷족보 및족보편찬공고 밀성박씨충간공파대종회는2020년11월15일(음10.1)정기총회시 족보편찬결의에따라다음과같이세보편찬을추진중에있어 공고하오니종원여러분의관심과성원으로역사에길이남을훌륭한 족보를만들수있도록성원바랍니다. ☆수단접수기간:2021.7.1.~2022.12.31. ☆ 수 단기 준 및 작성요령 : 세보편찬위원회 문의 바랍니다.뱚뱚 ☆반 질 :2023년상반기예정 ☆수단접수처:수단유사명단참조 ☆ 수 단접수 요령 : 수 단유사를 통해 접수 가능합니다 -편찬위원회- △고문 박병립 010-3272-3283,박상규 010-3818-3132,박종환 010-2688-3262,박기상 010-3455-7004. △대종회장(위원장)박원환 010-9037-8000 △도유사 박재윤 010-8703-4615 사무실 fax:054-652-4615 △부위원장 박형경(고령)010-3526-8701박중배(예천)010-5371-5655박종보(예천)010-8927-0792 뱚뱛박종호(고창)010-3611-5733 △수단유사(편찬위원) ▲박용태(고령) ▲박하경(고령)010-3803-4821 ▲박동진(대구) 010-4358-4085 ▲박 재희 (영천)010-3549-9889 ▲박규돈(고령)010-8579-7042 ▲박일호(예천)010-9505-1551 ▲박규환(안동)010-5 219-629 6 ▲박석태(예천)010-2804-6320 ▲박휘식(예천)010-9898-7411 ▲박수환(안동)010-7545-8747 ▲박용운 (충북단 양)010-3419-1661 ▲박기환(영주 풍기)010-6372-4357 ▲박익환(예천)010-7534-4141 ▲박윤환(서울)010 -8949-9 460 ▲박차환(대구)011-510-2710 ▲박재석(문경)010-2504-8453 ▲박연수(예천)010-8592-3144 ▲박이규 (고창)0 10-9453-3238▲박세근(고창)010-3625-5087▲박이기(고창)010-3638-1204 △감사 박원재(예천)010-9355-3509 박생경(고령)010-8579-7042 ※구독자님주변에혹충간공후예를알고계신분은이를적극알려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밀성박씨충간공파족보편찬위원회위원장박원환뱚 Ⅰ.서론 우리나라의 박씨(朴氏)들이 어떤 본관이든지 간에 거의 모두가 신라 (新羅)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들이다. 함안(咸安)에 대대로 살 아오는 경주박씨(慶州朴氏) 가문은, 신라(新羅) 시조 박혁거세와(朴赫居 世)의 후손 가운데서도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후손들이다. 시조의 41대손 추호(秋湖)박앙(朴 왑)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 館) 저작(著作)으로 있었는데,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 하여 함안(咸 安) 백이산(伯夷山) 아래 평광리(平廣里)에 정착한 것이 함 안과 인연을 맺은 시초이다. 그 후손들이 대대로 함안에 세거 (世居)하면서함안에서문호(門戶)를이루었다. 대대로학문하는선비집안으로때때로출사하는인물도나 왔지만, 대체로 학자 선비를 많이 배출한 함안의 선비사회에 서중요한역할을한가문이다. 아래에서 그 상계(上系)와 함안(咸安) 정착의 과정과 이후 전개된과정을고찰해보고자한다. Ⅱ.경주박씨의상계(上系)와함안정착 우리나라에3백여 종의 성(姓)이있고,각성 안에는 많게는 수십 개 적게는 몇 개의 본관(本貫)이 있다.이들 성의 기원은 대부분 중국에 있고,또 시조가 중국에서 온 것으로 족보에 밝 혀 놓은 성씨가 많다. 그러나 박씨(朴氏)는 중국에는 본래부 터 없는 우리의 토박이 성씨다. 중국에도 박씨가 가끔 보이지 만,이는전부우리나라에서건너간조선족(朝鮮族)이다. 경주박씨(慶州朴氏)는 신라(新羅)의 시조 박혁거세(朴赫 居世)의 후손이다.신라 6대왕 지마왕(祗摩王)의 현손인 박제 상(朴堤上)이 시조의 9세다.박제상이 신라 19대 눌지왕(訥祗 王) 때 왕의 두 아우를 고구려(高句麗)와 왜(倭)에서 구출하 고, 자신은 왜에서 살해되면서 충절(忠節)을 지킨 사실은 역 사에잘알려져있다. 박제상의 8대 후손에 박인범(朴仁範)이 있었다. 그는 당 (唐)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문명을 떨 쳤고, 신라로 돌아와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부시랑(禮部侍 郞)등의 관직을 거쳤다.븮동문선(東文選)븯에 그의 문장 2편과 시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高麗) 중기 (白雲) 이규보(李 奎報)는 그의 시화집(詩話集) 븮백운소설(白雲小說)븯에서 그 의 븮과경주용삭사시(過涇州龍朔寺詩)븯를 최치원(崔致遠), 박 인량(朴寅亮)의 시와 함께 제시하고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시로써 중국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은 이 세 분으로부터 시작 하는데, 문장이 나라를 빛내는 것이 이러하다.[我東之以詩鳴 於中國, 自三子始. 文章之華國, 有如是夫]”라고 극찬을 하였 다. 그러나 김부식(金富軾)의 븮삼국사기(三國史記)븯에서는, “역사에서 그 행적과 사실을 잃어 버려 열전(列傳)을 지을 수 없다.”라고 했다. 신라 말기 최치원의 븮계원필경(桂苑筆耕) 븯에 븮신라탐후사박인범원외(新羅探候使朴仁範員外)븯라는 글 이 있으므로, 최치원과 동시대인 신라 말기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븮경주박씨세보(慶州朴氏世譜)븯에서는 신라 문 무왕(文武王) 시대의 인물로 기록해 놓았는데, 이는 문제가 있다. 혁거세왕의 40세손 박자신(朴自信)은, 1358년에 태어났다. 1389년에 문과에 올라 검열(檢閱)을 거쳐 밀직사(密直使)가 되고, 예문관(藝文館) 응교(應敎) 겸 국자감(國子監) 직학 (直學)이 되었다.1392년 조선왕조(朝鮮王朝)가 건립되자,문 을 닫고 자정(自靖)하였다. 양촌(陽村) 권근(權近), 호정(浩 亭) 하륜(河崙)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우의정 정탁(鄭擢)이 힘써 추천하여,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로 불렀 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399년에 별세하였다. 그 뒤 우찬성 (右贊成)에추증되었다. 조선왕조(朝鮮王朝)에 들어와 박자신(朴自信)의 아들 박 앙(朴 왑)이 있었는데,호가 추호(秋湖)다.시조 혁거세왕의 4 1세손이다. 1451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저작(著 作)을 지냈다. 1455년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왕위를 빼 앗는 것을 보고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서산(西 山) 유자미(柳自湄)과 함께 벼슬로 부르는 것에 응하지 않고 돌아와 함안(咸安) 백이산(伯夷山) 아래 평광리(平廣里)에 서숨어지냈다.때때로백이산에오르기도하고,고마암(叩馬 巖)아래를거닐며서시를읊어자기뜻을지키며살았다. 동봉(東峯)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또 다른 호다.어릴때부터세종(世宗)의지우를입었고,커서단종(端 宗)을 도우라는 부탁을 받았다.열심히 공부하여 인재가 되어 단종을 도울 계획을 하고 있던 중,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보던 책을 다 불살라버리고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전국을 방랑하고 있었다. 추호(秋湖) 자신 은 수양산(首陽山)이라 불리는 함안의 백이산에 은거해 살지 만, 동봉은 전국을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언제 한번 백이산으 로 초청할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충성심과 절개에 있어서는 초호 자신보다 더 열렬하다. 만나 같은 회포를 이야기할 기회 가 없으니, 자기 혼자 슬퍼한다는 뜻이다. 고마정(叩馬亭)은 백이산 북쪽 절벽 아래에 있다. 그 고상한 기풍과 맑은 절개 는,능히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못된 사람은 청렴하게 하고 나 약한 사람은 일어서게 만들어, 함안의 명교(名敎)에 큰 공이 있다. 백이산의 남쪽 평광리에는 경주박씨 박앙(朴 왑)이 터를 잡 아 살기 시작하였고, 백이산 북쪽 원북리(院北里)에는 어계 (漁溪) 조려(趙旅)가 터를 잡아 살았다. 다 같이 절의(節義) 를 지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 찬탈의 불의를 참지 못 해 벼슬에 뜻을 끊고 남쪽으로 내려와 함안 백이산 아래에 정 착하였다. 함안에 백이산(伯夷山)이 있는 것은, 함안 사람들 이절의정신을키우는데많은도움을주었다할수있다.백이 의 이름을 듣고 백의의 정신을 배운다면, 누구나 청렴결백한 사람이될수있다는교훈을주고있다.어계는조선후기에생 육신(生六臣)의 한 분으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으나, 추호는 그렇게되지못했다. 조선 전기에 절의를 지킨 추호(秋湖) 박앙(朴 왑)과 어계 (漁溪) 조려(趙旅) 같은 두 인물이 함안에 정착한 것은, 이후 오랫동안함안의선비정신함양과도덕성제고(提高)에큰공 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추호는 함안 사람이 되었 고, 그 후손들이 문호를 유지하며 적지 않은 인물을 배출하였 다. Ⅲ.함안경주박씨가문의인물 함안의 경주박씨 가문은 절의와 충(忠)그리고 효(孝)를 숭 상하고 있는 대표적인 가문이라 할수 있다. 그리고 문학이 뛰 어나 지역의 문풍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조선전기 절의 추호 박앙 선생을 비롯 모암 박희삼과 두 아들 황암·송암 그리고 조선 말 이남공으로 이어지는 학풍은 함안의선비정신함양과도덕성제고(提高)에큰공헌을했다 △모암(茅菴)박희삼(朴希參) 박유(朴 찮)의 외아들이다. 1486년 함안의 평광리에서 태어 났다. 자는 노경(魯卿)이고, 호는 모암(茅菴)이다. 어려서부 터 총오(聰悟)하였고,말을 배우자 말자 글을 읽을 줄 알았다. 8세 때부터 븮소학(小學)븯을 배우기 시작 해 고을에서는 ‘소학 동자(小學童子)’라고일컬었다.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널리 읽었는데, 정자(程子) 주 자(朱子)를 근본으로 삼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어울 리면서 두 아들 송암(松 散) 박제현(朴齊賢), 황암(篁散) 박 제인(朴齊仁)으로하여금남명을스승으로삼아배우게했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건원릉(健元陵) 참봉( 핫奉)에 임 명되었으나,부모가고령인것을이유로사직하고돌아왔다. 전후의 부모상에 모두 여묘(廬墓) 살이 하면서 죽을 먹고 지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충성스럽 고 후덕한 훌륭한 인물로 우뚝이 옛사람의 기풍이 있다.[忠厚 長者,쳬然有古人風度.]’라고칭찬하였다.문집을남겼다. 서간(西澗) 정운(鄭雲)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자형 이다. 모암(茅菴)의 관대하고 중후한 모습을 보고 도의지교 (道義之交)를 맺었다. 모암의 고상한 행실과 아담한 정취를 보고 자녀의 혼사를 요청하면서, “형은 우리 유림의 군자요. 혼인을 맺어서 길이 덕 있는 사람의 빛을 보고 싶소.”라고 했 다. △ 송 암 (松 散)박제현(朴齊賢) 모암(茅菴) 박희삼(朴希參)의 장자이다. 자는 맹사(孟思) 이고, 호는 송암(松 散)이다. 1521년 평광리(平廣里)에서 태 어났다. 남명(南冥) 조식의 문하에서 배웠다. 추천으로 선공감(繕 工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문집 븮송암 집(松 散集)븯이 있다.1575년 작고하니,향년46세였다. 송암과 그 아우 황암(篁 散)박제인(朴齊仁)에 대해서 남명 (南冥)조식(曺植)이, “함안의 높은 선비로 형이 나은지 아우 가 나은지 판별하기 어렵도다.[咸安高士, 難兄難弟.]”라고 극 찬을했으니,그인물됨과학문은짐작을하고도남는다. 당시 함안군수로 재직하던 한강(寒岡) 정구(鄭逑) 송암의 덕기(德器)를 보고는, 븮충후한 선비[忠厚儒者]븯라고 칭송하 였다. △ 황 암 (篁 散)박제인(朴齊仁) 모암(茅菴) 박희삼(朴希參)의 차자이다. 자는 중사(仲思) 이고,호는황암(篁 散)이다. 1536년 평광리(平廣里)에서 태어났다. 남명(南冥) 조식의 문하에서에서 배웠다. 추천으로 1584년에 태릉(泰陵) 참봉 ( 핫奉)에임명되었다. 선조(宣祖) 때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다. 선조가 “마땅히 무슨 책부터 먼저 가르쳐야 하느냐?”라고 묻자,황암 은 “븮대학(大學)븯과 그 소주(小註)까지 함께 가르치는 것 만 한 것이없습니다.”라고대답했다.그러자선조가왕자에게일 러 “너는 현명한 스승을 얻었으니, 매우 예우하라.”라고 했다. 선조가 직접 천보산(天寶山) 세 글자를 쓰고, 바위와 대나무 그 림 을 그 려 서 내 려 주 었 다 . 바 위 에 대 나 무 를 그 린 것 은 황 암 (篁散)의 호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니, 대단히 총애를 받았음 을 알 수 있 는 일 이 다 . 1599에 송라찰방(松羅察訪)에 임명되어 부임했다. 1605년 에 군위현감(軍威縣監)에 임명되어 3년 동안 근무하다가 돌 아왔다. 황암에게 직접 배운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는, “대개 아라가야(阿那伽倻)가 나라를 연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산천 이 정기를 잉태하여,인걸,호걸다운 인재, 큰 그릇,이름난 선 비, 노숙한 유학자를 낳아 일컬을 만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만, 덕(德)이 순수하고 학문이 바르기로 선생과 같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라고 했다. 직접 만나본 사람들이 극 찬을 했으니, 황암의 학문과 덕행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를알수있다.문집븮황암집(篁 散集)븯이있다. △이남(夷南)박규환(朴圭煥) 송암(松 散) 박제현(朴齊賢)의 11대손이다. 자(字)는 군수 (君壽)이고,호는이남(夷南)이다.1840년에태어났다. 쌍봉(雙峰) 이상두(李相斗)를 따라 과거에 필요한 문장을 배웠다. 도도히 문장을 지어 냈는데, 웅호(雄豪)하고 정민(精 敏)하여, 문단의 노숙한 사람들도 칭찬하였다. 향시(鄕試)에 여러번합격했다.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 월고(月 琦) 조성가(趙性家), 후산(后山) 허유(許愈),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 등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며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였다. 과 거에 필요한 글 이외에 옛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 는 것을 알고, 지엽적은 것은 제외하고 핵심적인 것에 마음을 오로지 썼다. 븮소학(小學)븯과 븮격몽요결(擊蒙要訣)븯을 도학 (道學)에 들어가는 요점으로 삼았다.공부가 성명(性命)이기 (理氣)의 깊은 곳이나 하도낙서(河圖洛書) 등 변화하는 상수 학(象數學)이나 예법의 도수(度數)의 상세함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연구하지않은것이없었다.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싫증내지 않고 부지런히 가르쳤다. 또 고을의 선비들과 향교(鄕校)에 모여서 향약(鄕 約)을 만들고 강의를 개설해서 유풍(儒風)을 진작시켰고, 많 은인재들을길렀다. 선조 송암(松 散) 황암(篁 散)이 남긴 글이 대부분 흩어져 그 학덕(學德)을 상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문 집 가운데서 관련되는 시문을 모아 다시 간행하여 세상에 전 했다. 평천서원(坪川書院)이 훼철되었을 때 집안사람들의 힘을 모아 서당을 지어, 추모하고 강학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19 23년에작고하니,향년84세였다. Ⅳ.경주박씨가문의서원(書院)사우(祠宇) 경주박씨 집안의 세 인물을 향사하는 평천서원(坪川書院) 이 군북면(郡北面) 명관리(明館里)에 있었다. 모암(茅庵) 박 희참(朴希參), 송암(松散)박제현(朴齊賢),황암(篁 散) 박 제 인(朴齊仁)을향사(享祀)했다. 1868년 고종(高宗)때 나라의 명령으로 훼철되었다.1915년 평천서원유허비(坪川書院遺墟碑)를 세웠는데, 서원은 복원 이 안 되고 유허비만 남아 있다. 서원에 된 관계 자료도 아직 발견하지 못 하여, 서원의 건립과 훼철에 따른 자세한 역사를 알수없다. 황암(篁 散) 박제인(朴齊仁)은, 함안면(咸安面) 대산리(大 山里)에 있는 도림서원(道林書院)에도 한강(寒岡) 정구(鄭 逑), 모촌(茅村) 이정(李瀞), 황공(篁谷) 이칭(李칭)과 함께 향사되고있다. 도천사(道川祠)는, 모암(茅菴) 박희삼(朴希參), 송암(松 散) 박제현(朴齊賢), 황암(篁散) 박제인(朴齊仁)을 향사(享 祀)했다.함안군관아서쪽20리에있었다. 이번 발표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인물 외박명기, 박정화, 박 유,송계 박이,일관당 박률,봉계재 박종원,농은 박도선,삼학 당 박근, 쌍학당 박무, 거제부사 박임, 수심재 박래정, 봉훈재 박함,삼괴당 박래복,수은 박황,명곡 박동후,매와 박사,황림 박사형, 광거 박정식, 쌍천 박상엽등이 함께 소개되었으나 지 면상학술대회주제발표인물에대해소개하고추후별도소개 하고자하오니양지하여주시기바랍니다. -편집자주- Ⅴ.결론 조선(朝鮮) 전기(前期) 추호(秋湖) 박앙(朴 왑)이 세조(世 祖)가 왕위를 찬탈하는 불의를 보고 벼슬을 버리고 함안(咸 安)백이산(伯夷山)아래로 정착한 이래로 570년의 역사가 지 나는 동안 경주박씨(慶州朴氏)는 함안에서 세거(世居)해 왔 다. 대표적인 선비 가문으로 대대로 많은 학자 선비들이 나와 바른 자세로 학문을 하고 수양을 하여 가문의 격을 높였다.특 히 송암(松 散) 박제현(朴齊賢) 황암(篁 散) 박 제 인 (朴 齊 仁 ) 형제에 이르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 남명(南冥) 조식 (曺植)의 제자가 되어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일원으로 참여 하게 되어 함안에 남명학파를 이식하여 함안의 학문과 정신 의위상을높였다. 그 이후 후손들은 꾸준히 학문을 하면서 시문을 남기고, 문 호를유지하면서,향촌사회를교화시키는데앞장서왔다. 문집을 남긴 인물이 적지 않으나,전란으로 정리가 못 된 채 산일된 것이 많아,연구하는 데 한계가 있다.지금이라도 남은 자료를잘정리해서가문의역사를다시밝힐필요가있다. 경주박씨(慶州朴氏)의함안(咸安)정착과전개 허권수박사 허권수박사 경남함안군군북면명관리전경및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