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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터넷 카페 '벌터마을'에 송강재 건립기에는 송강재의 위치는 대병면 양리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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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재(松 崗 齋)[합천군지 1190 松 崗 齋 記 66] 합천군 대병면 양리 (밀양박씨)
집에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뜻은 4대조 봉사(奉祀)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5대 선조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예(禮)이므로 가묘(家廟)에 뫼시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자기가 존재 하게 된 근본이 조상의 덕이라 생각하여 제사에 정성을 다하고 시조(始祖)까지 묘제(墓祭)를 지내는 것이 천리와 인정, 예(禮)에 합당(合當)하는 것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예원(掌隸院) 판결사부군(判決事府君) 밀양박공(密陽朴公) 휘(諱) 천택(天澤), 호(號)가 송강(松岡)께서는 영특(英特)한 자질로 조상의 아름다운 덕을 이어받아 충효를 다하여 우애가 독실(獨室)하고 오랜 학문 연구로 학식을 많이 쌓고 정의(正義)를 실천하니, 당시 선비 친구들이 모두 존경하였다.산소는 가회면 도탐리, 산 간좌(艮坐 : 동북 방향을 등진 자리.)이며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허씨(許氏)이며, 산소는 송강공(松岡公)의 묘, 위에 있고 손자, 증손의 묘소도 가까이에 있다. 슬프구나! 후손들이 못나서 흩어져 살아, 제관(祭官)이 재소(齋所)에서 밤을 지낼 수 있는 재실(齋室) 한 칸을 건립하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도다. 그래서 1984년(갑자년)에 문중 종친들과 의논하여 헌금을 모아 재실을 건립하였다. 재실은 산소, 옆에 짓는 것이 상례이나 그 묘소가 산고곡심(山高谷深 : 높은 산에 계곡이 깊음.)에 위치하고 또한, 세상이 예전 같이 성묘에 대한 정성이 부족하고 뒷일 또한, 염려되어, 묘 밑에 짓지 않고 편리하게 지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대병면 양리에 건립하였다. 재호(齋號)를 송강재(松崗齋)라 하였는데, 판결사공(判決事公)의 호(號)를 취하여 송강공(松岡公)을 영원히 추모(追慕)하려고 한 것이다. 옛 선조 생각은 기(氣)와 혈(血)이 유전(遺傳)되어 자손이 된 것이라, 반드시 생각하였다. 자손은 마땅히 성의와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올릴 때, 조상도 자손의 정성에 대한 공경과 예우를 기(氣)의 느낌으로 표하는 상호 교류를 되풀이한다. 그러면서 감복하고 흠향(歆饗)을 한다. 제사에 정성과 공경이 없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것과 흡사한 것이다. 참으로 두렵지 아니한가. 재실을 건립하고 제사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조상신에게 잘 받쳐 다고 조상을 잘 섬긴다 말 할 수 없다. 항시 선조를 사모(思慕)하는 마음으로 언행(言行)을 하면 후손에게 올바르게 전달하고 실천하여야 조상을 바르게 추모하는 것이다. 조상의 미덕(美德)을 외우며 친척끼리 활짝 웃고 사계(沙溪) 소학(小學)의 선행에 람전여씨[(藍田呂氏,「형제사인 장대중(兄弟四人長大中목융(穆肜)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 네 사람이 재산과 살림을 공유했다. 그러다가 각각 아내를 맞이하자, 마침내 그 아내들이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요구하다 보니, 자주 싸우고 다투는 일이 일어났다. 목융(穆肜)은 매우 분노하며 한탄했다. 그래서 방문을 닫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매질하면서 말했다. “목융아! 네가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 해서 성인의 도리를 배운 까닭은 세상의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집안조차 바로잡지 못하느냐.” 이 말을 들은 아우들과 제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마침내 다시 우애가 돈독해졌고 집안도 화목하게 되었다.)」이라고 하였는데 『언행록(言行錄)』을 살펴보면 대중(大中)은 마땅히 대충(大忠)이라고 하여야 한다. 대충(大忠)의 자(字)는 진백(晉伯)이다.)]의 향약(鄕約 : 조선 시대에,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 규약. 중국 송나라 때의 여씨 향약(呂氏鄕約)을 본뜬 것으로, 조선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주장으로 추진되어 영ㆍ정조 때까지 전국 각지에서 실시하였다.)과 ‘위씨(韋氏)의 화수(花樹 : 당(唐)나라 때 위씨(韋氏) 일가들은 종회법(宗會法)이 있어, 인근의 친족들이 자주 한 자리에 모여서 골육(骨肉)의 정을 도탑게 하였다.)'의 뜻을 알고 실천하며 조상의 빛나는 업적을 재현하여 효성을 다하고 동성동본인 일가(一家) 사이, 정이 두텁고 화목하게 친족 끼리 잘 지내는 도리를 다할 때, 가문이 크게 번창함이 옛날과 같아서, 이 재실은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힘쓰고 힘쓸지어다. 재실 건립에 힘껏 일하고 중건한 종철(鍾鐵), 종만(鍾萬)이 있다. 한 동네에 나이 많은 어른의 부탁을 사양하기 어려워서 분수에 넘쳐 기문(記文)하기에 망령(妄靈)한 죄는 면할 수 가 없도다. 1987년 정묘년(丁卯年) 10월, 10대손 재동(在東) 근기(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