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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호(韓百鎬j 1907년∼1976년)
휘(證)는 백호(百鎬)이고 호(號)는 일정(-亨)이다. 공(公)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요 근세교육가(近世敎育家)이다. 어려서부터 마명(碼明)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리었고 7∼8세에 이미 사서(四書)를 통독(通讀)하여 주위(周圍)를 놀라게 하였다. 1921년 14세 떼에 강화군수(江華那守)를 지내고 일제총독부(日帝總督府)의 지명수배(指名手配)를 받아 중국(中國)으로 亡命(망명)하는 종조부(從祖父) 한영복(韓永福)을 따라 중국(中國)으로 들어가 북경(北京)에있는 육영고퉁학교(育英高等學校)와 연경대학(燕京大學) 경제학부(經濟學部)를 졸업(卒業)하고 귀국하여 1927년 신간회(新幹會) 창립당시(創立當時)에 참여(參與)하고 광주지회(廣州支會)의 간사(幹事)로 활동(活動)하면서 각종 독립운동(獨立運動)에도 가담(加擔)하였다.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숭문중학(崇文中學)에서 교사(敎師)를 하였고 1940년에서 194딩년까지는 보인상업학교(輔仁商業學校)에서 교사를 역임하였는데 이때에 일본군인(日本軍A)인 군사교련검열관(筆事敎練檢聞官)이 한 번도 배우지 않은 군인칙어(軍人勅語)의 암송(暗誦)을 강권(强勸)하였는데 배우지 않은 칙어(勅語를 단 한 번에 막힘없이 암송하여 검열관(檢閱官)은 물론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해방(解放)후인 1946년에는 경성공업학교(京城工業學校) 교사를 거쳐1952년에는 보얀상업학교(輔仁商業學校) 교감(校藍)과 부교장(副校長)을 역임하였고, 1953년에는 서울사범학교(師範學校) 교감(校짧)으로 옮겼다가 1959년에는 성남중 · 고등학교(城南中 · 高等學校) 교깜 및 교장서리(校長暑理)를 지내고 1967년까지 교장(校長)으로 재직하고, 보인중 · 상업고등학교 교장(輔仁中 · 商業高等學校 校長)으로 마지막 봉사를 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 온 힘과 정열(情熱)을 불태운 불멸의 애국지사(愛國志士)요 교육가(敎育家)이다. 출처 : 성남향토문화총서-8 분당동, 서현동(율동마을), 수내동, 정자동 돌마마을지(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