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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을 누빈 바다의 거인 해군 창설에 앞장 섰던 박옥규 제독
대한민국 제2대 해군참모총장(중장)의 자는 옥규이고 본관은 밀양이다. 공은 중세조 규정공 휘 현은 25세조, 공효공 중손 문경공 충원숙위공 승종은 중엽에 나타난 조상이다. 곧 거문도에 입도조인 종필의 7세손이며 부친(집강) 노익 자 규홍 호 일호옹과 모친 경주김씨의 3남으로 서기 1901년에 덕촌리(덕흥리)에서 출생하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건장한 체구와 강직한 천성이었고 성장함에따라 과감한 기백과 탁월한 재질이 뛰어났다. 공은 일찌기 거문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관서대학 2년 수료후 관립 진해고등해원양성소 출신으로 약관에 오대양을 누비며 항해술을 연마 터득하여 명실공히 명 선장이오 바다의 거인으로 사해에 명성을 떨쳤다. 서기 1945년 조국광복을 맞아 넘치는 정력과 뺴어난 실력으로 결박강직하고 투철한 애국사상으로 일관하여 낙후된 해운계의 양성에 전력을 경주하셨다. 서기 1949년에 해군에 투신하여 1953년에 제2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셨다.
공은 암야에 등대처럼 해군창설기에 선도적 역활을 담당하셨다. 공은 예편 전과 후에 초대 대한해운공사사장 초대 항만청장, 초대 중앙해난심판위원회 위원장직을 역임하는등 바다의와 더불어 전 생애를 조국의 해군육성과 해운계의 발전에 초석으로서 소임을 다한바 그 공적이 지대하였으므로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미국 은성무공훈장등을 받으셨다. 공은 향리의 후진교육을 위하여 덕촌국민학교의 3개교실(석조) 개축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하셨고 6.25동란때는 향민이 절곡으로 아사지경에 있을때 백미 천섬과 정○ 200팔를 ○시하는등 큰 덕○베푸셨다. 공은 이와같이 오로지 충성과 의리를 다하○○ 1971년 1월 28일 향년 71세를 일기로 서울 자택에서 유명을 달리하셨다. 공의 숭고한 사상과 찬연한 업적은 민족사에 길이 빛날것이며 이 고장의 영광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고장의 군, 관, 민이 공을 흠모하여 송덕탑을 견고히 세워 후세에 전하는 바이다.